그 옛날 밥 짓고 빨래하기 위해 샘물에 의지했던 우리네 서민들에게 더없이 친근한 물장수.
서민의 소박한 삶이 그대로 녹아든 물지게를 묵직하니 짊어지고 그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역사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단 한 사람, 문일용 님이 그 명맥을 이어 가는 정도일까.
‘마지막 물장수’라고 하면 세월의 흐름을 외면한 고집스런 노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의 나이 불과 마흔여섯. 그가 시대를 거슬러 물장수라는 직업을 택한 데는
그의 아버지가 서 있다.
함흥에서 태어난 아버지 문광식 님(81세)은 한국전쟁 직전,
북청에서 물장수를 하다가 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
당시만 해도 물이 워낙 귀해 물장수를 천직이라 여기며 7남매를 길러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수도 시설이 보급되면서 물을 찾는 이가 해가 다르게 줄었고,
물수레가 부쩍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물장수의 대가 끊기는가 싶더니 갑자기 닥친 IMF로,
재작년 둘째아들 일용 님이 직장을 잃게 되었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생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수레를 이어받았다. 그렇다고 형편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할 때 거래처가 육십여 곳을 웃돌았는데, 삼십 군데에서 수도를 들여놓으면서
절반으로 뚝 떨어졌지요. 그나마 수도가 있으면서도 제 물을 써 주는
고마운 단골들이 있어 힘을 냅니다.”
단골 대부분은 아버지 때부터 20∼30년을 거래해 온 자갈치시장 상인들이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도 날이 좋을 때면 지팡이를 의지해 단골집에 들러
옛정도 나누고 ‘우리 아들 성실하게 잘 하나’ 물어본다고.
그리고 물이 새지는 않는지 타이어는 튼튼한지 꼼꼼하게 수레를 살핀다니,
북청물장수 50년 연륜이 풋내기 아들에겐 아직 까마득하다.
그래서 문일용 님은 철저히 아버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티셔츠, 조끼 심지어 장화까지도 아버지가 물장수를 하던 때 쓰던 것들이다.
“단 한 집이라도 물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때까지는 계속해야지요.”
물장수의 유일한 밑천이자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일 물수레를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세월 너머 흐릿한 물장수들 가운데 유독 이들 부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이 순간에도 물장수로서 오늘을 살고, 또다시 내일이라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일용 님 (물장수)
(글/이수희, 사진/최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