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오메 아그덜 없응께 못 살겄어야….”
아이들 서울에 보낸 지 하루도 못 지나 시어머니 군산댁은 울상을 짓는다.
고추밭, 참깨밭에서 농사일에 마음 붙여 몸을 놀리면 곤한 기운에 정신없이
잠이라도 자련만 줄창 내리는 비에 붙들려 집안에만 매여 있다 보니
잠도 안 오고 아이들 생각에 덤벼드는 외로움이 무서웠나 보다.
아버님 독방 드리고 아이들과 함께 주무시던 군산댁은 “허전항께 같이 자자”며
내 손을 잡아 끈다. 손주놈들이 금쪽 같지 않은 할미 어디 있겠냐마는
어머니께는 가슴에 묻은 아들 대신 들어찬 아이들이다.
성미 급한 군산양반 젊어서 외항선 타고 천지사방 돌아다닐 때
타성받이 설움 받아 내며 촌수도 멀찍한 시이모 내외 수발하고
영광 땅 한 언저리에서 농사지어 리어카 행상으로 살았어도
육남매 바른 심성으로 키워 낸 군산댁이다.
이제 겨우 영감 힘 빌어 농사짓고 그작저작 살 만한데 말년복까지 차지 않았는지
의지가지 언덕이었던 큰아들 5년 전에 먼저 보내고도 정신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고물고물한 손주 두 놈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항상 바쁘고 늦는 엄마를 대신한
할머니의 손맛에 익숙하고 풍족해 보인다.
고모네, 외삼촌, 작은아빠네 집에 들러 인사하고 얼굴도장 찍으려면
족히 일주일은 걸리니 잊고 편하게 지내시라고 해도 바깥에서 작은놈 성호가
“할머니!” 부르는 것 같다며 혼자 두리번거리신다.
아버님까지도 “아그덜 빨리 데려오라”는 말에 이대로 두면 큰일이다 싶어
“방학 때 며칠 가 있는 것도 못 참으면 아이들 커서 떠날 땐 어쩌실 거냐”며
부러 모진 소리를 던진다.
그 약발에 힘입어 한 며칠 참는가 싶더니 또다시 애들 타령이다.
나중 일은 뒤에 생각하기로 하고 아이들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전화하니 쌩뚱한 반응이다.
서울에서의 며칠이 재미있었는지 일주일 채워서 온단다.
어머닌 적이 서운한 낯빛이 되신다.
요즘 같아선 어쩌다 비추는 햇볕 좋은 날에 펴 널어야 할 농사일들이 첩첩인데도
한동안 기다리다 만난 아이들과 할머니의 상봉은 이산가족 ‘저리가라’다.
그제야 군산댁은 “일주일이 일 년보다 더 길었는디 이제사 살겄다”며 주름진 웃음을 짓는다.
며칠 청소 안 해도 되던 집이 금세 어질러져도 두 양반 좋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노인들은 외로워하다 죽는 겨.” 군산댁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