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뭘 좀 정리할 게 있으니 오라고 하신다.
아, 또 취미생활을 하시려나 보다 싶어 보자기 두어 개를 챙겨 집을 나섰다.
우리 어머니는 좀 특이한 분이라 취미도 별나다.
옷 욕심이 많아 이런저런 옷을 해입으시고는 작아진 옷, 싫증난 옷을
딸과 며느리들에게 생색을 내며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
못 입게 된 뒤에도 혹시 모른다면서 꼭 두어 철 더 지나 주시는 통에 우리 형제들은
얻어 오면서도 입을 불퉁 내밀게 마련이었다.
짐작한 대로 어머니는 장롱 속 커다란 종이 상자들을 가리키며 '저것 좀 꺼내라' 하셨다.
안에는 곱게 개켜진 한복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한복이라면 별 소용에 닿지 않으니 오늘도 그다지 색다른 소득은 없겠다 싶어
지레 실망하는 내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아버지랑 내가 나중에 입을 것들만 챙겨 두고 나머지는 나눠 주던지 해야겠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나중에'란 돌아가셨을 때를 이르는 거였다.
그러니깐 수의(壽依)로 쓰일 옷을 정해 놓자는 말씀이었다.
"죽으면 시집가듯 고운 옷을 해 입힌다지만 이렇게 다 빛깔 고우니 새로 할 필요가 뭐 있냐"
하시며 두루마기, 아버지 도포 그리고 남색 치마 등속을 하나씩 골라 내셨다.
어머니의 그런 행동은 좀 뜻밖이었다.
두 분 다 일흔을 넘기시긴 했으나 몸에 해로운 것은 절대로 안 드시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당신들 스스로 건강을 끔찍이 챙기는 덕분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우리 형제들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건강하신 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몫 하나, 아버지 몫 하나의 상자 정리를 마치고 나서 어머니는 "이제 신발과
널 안에 넗고 감쌀 이불만 있으면 되겠다. 그건 나중에 네가 알아서 만들어 봐라" 하셨다.
차를 마시면서 어머니는 "남들은 수의 챙기면 서글퍼진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언제 죽어도 죽을 것이고 무엇이든 준비해 두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러셨다.
어머니의 음성은 쓸쓸했다.
입지 않을 것이 분명하면서도 한복을 서너 벌 싸 들고 돌아오면서 나는 몹시 착잡했다.
어머니는 미리미리,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준비하며 살아오신 분이었다.
혼자서 모든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와 누구 한 사람 불평을 늘어놓고 기댈 곳 없었던 어머니.
몸도 마음도 꼿꼿하기 이를 데 없어 아직까지 우리 형제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어머니와 아버지.
난생처음 두 분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소설가 서하진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