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누가 살까 - 월간 '좋은생각(2001년 10월)' 에서 발췌.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제법 떨어진 산 밑에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농가가 한 채 외로이 있습니다. 누가 사는지 몰라도 며칠씩 불이 꺼져 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밤 11시 전후 해서 불이 켜집니다. 농가의 창에 희미한 불빛이 비치면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번지고, 사람과 부대끼며 힘들게 하루를 보낸 노동의 수고로움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살까? 어떻게 살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힘들여 가 보았습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있는 쇠락한 집에 울도 담도 없고 마당에는 오래된 장독대와 채송화, 박꽃만 어지러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구에 나무로 된 팻말이 있었습니다. \"사람 산다. 농사 연장 가지고 가지 말거라.\"
아마 버려진 집인 줄 알고 오래된 농기구가 신기하여 더러 집어 가는 모양입니다. 이웃 주민에게 물어 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사신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시내에 있는데 굳이 농사일을 잊지 못해서 낮에는 밭일 하시고 저녁 무렵 시내 집에 다녀오신답니다. 할아버지의 농사일은 소득이나 취미가 아닌 당신 삶을 관통하는 생명의 춤사위가 아닐까 합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내려다보니 할아버지 혼자 논물을 가두고 논둑을 손질하시느라 열심입니다. 이삼 일 뒤 모심기를 하였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모를 심는 할아버지에게서 구도자의 치열한 수행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는 모습이 저리 아름다울까? 할아버지를 통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배움을 얻지 않을까요? 이 세상 어디에서 누군가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 이상열, 진명출판사
- 삶을 관통하는 생명의 춤사위.. ...... Young-pur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