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은 마흔셋에 결혼했는데, 그의 늦은 결혼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친척들조차 영화감독인 그가 예쁜 여배우들에 둘러싸여 지내느라 결혼이 그렇게 늦어진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 엉뚱한 편견은 그의 아내가 첫아이를 낳을 때 담당 산부인과 원장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원장이 아주 특별히 그를 분만실로 데리고 들어갔던 것이다.
원장은 그를 아내 곁에 불러다 앉히며 \"꼼짝 말고 여기 앉아 산모가 몇 분 간격으로 진통을 하는지 기록하십시오\" 하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12시간 동안 그는 분만 대기실에서 아내 곁을 지켜야 했는데,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진통이 올 때마다 아내가 지르는 고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수없이 원장을 부르러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분만실까지 불려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아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내가 마지막 필사의 힘을 쓰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도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었던 그는 아내 이상으로 고통스러웠고, 자신이 대신할 수 없음에 애간장이 탔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아내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고 성스러웠다. 그때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여자를 떠나지 않겠다' 고 결심했다. 그리고 '아비에겐 몰라도 어미에게 불효한 자식은 천벌을 받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의 경험은 그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 뒤로 그는 시대와 관습 때문에 희생됐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영화 속에 담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