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상상히 가세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것 같은, 물밑
의 모래알 하나하나가 다 비치고, 물결에 조각조각 부서지는 햇
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메랄드 블루의 바다.
남태평양이나 서인도해에 가야만 있을것 같은 그런 꿈의 바다가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저는 바다를 무척 좋아해서, 어릴때 부터 가족끼리 여행을 갈때
면 무조건 바다로 가자고 졸랐댔었죠. 아마 그 탁트인 느낌과
짜릿한 소금내음, 그리고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어린마음에도 무
척 멋져보였나봐요.
하지만 바다에 갈때마다 보이는건 쓰레기와 행락인들로 분방한
모습, 그리고 사람으로 가득차 오히려 답답한 느낌뿐. 부모님
은 "유명한 곳이면 다 이렇지" 하시며 안타깝게 여기셨지만,
전 포기하지 않았어요. 푸른 바다를 찾는건, 그때부터 제 꿈중
하나로 단단히 자리잡았던거 같아요.
중학교때, 그러니깐 14살의 여름에, 저와 가족은 제주도로 여행
를 가게됐어요. 계획이 잡혔던 1주일 전부터 전 가슴이 두근거렸
죠. 사진에서 눈여겨 보아놨던 제주도 중문 해수욕장의 모습은
멋진 야자수와 하얀 백사장이 푸른바다와 깎아지는 암벽을 배경
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바로 제가 꿈꿔오던 그 모습이었거든요.
하루를 꼬박 새워가며 파도를 갈라 제주도 페리 선착장에 도착
했을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한라산이었어요. 제주도 어
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한라산.- 갑자기 내가 제주도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면서, 꿈꿔오던 푸른바다를 보게되리라는 기대에
저는 한껏 부풀었어요.
다음날,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난 저는 아직도 졸음에서 덜 깨
어난 가족들을 이끌고 중문 해수욕장으로 향했어요. 해안가의
절벽을 따라 내려가는 계단을 구비구비 돌아 마침내 눈앞에 바
다가 펼쳐졌을때, 저는 그게 제 기대와 다르다는걸 눈치챘어요.
사장의 모래는 흰색보단 적갈색에 가까웠고, 바닷물도 푸르긴
했지만 깊어보이기만 할 뿐, 저의 부풀려진 기대를 채울 만큼
이쁘지는 않았어요. 80점은 줄 수 있었지만 100점 짜리 답안지
는 아니었던 거죠.
그 후로 이틀간 협제 해수욕장, 한려 해수욕장등 관광지도에
나와있는 유명한 해변을 가보았지만 그들도 제 눈에 차진 않았
어요. 곧 여행의 끝이 다가왔고, 저는 이번에도 푸른 바다를 볼
기회를 놓치나 싶었답니다.
마지막 날, 저희 가족은 제주도의 마지막 코스를 동쪽에 위치한
한 작은섬으로 잡았답니다. 원래는 서귀포에서 잠수정을 탈려고
했었는데, 성수기라 표가 다 팔렸던 거였죠. 그래서 실망 반, 기
대 반으로 우리는 '그 섬'으로 향했어요.
20분 정도 파도를 갈라서 마침내 섬에 도착했어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크기에 양철 지붕의 가옥이 빼곡히 모인 작은 마을,
흙이 얇게 깔린 시골길과 제주도 전통의 낮은 돌벽은 바다의 소
금향과 어우러져 제 마음을 설래게 만들었죠.
섬의 끄트머리에 하얀 등대가 있는데 가볼만 하다는 섬주민의 말
을 듣고, 저희 가족은 무작정 가르쳐준 방향으로 걷길 시작했어
요. 한 10여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푸른 잔디가
깔린 목초지가 드러났어요. 그리고 그 끝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하얀 등대, 깎아진 절벽이 그림처럼 나타나더군요.
바닷바람이 제 등을 살짝 떠밀자 저는 신이 나서 뛰기 시작했어
요. 언덕으로, 등대로.. 마침내 섬의 끄트머리에 도착했을때, 저는
마치 잘라낸듯이 가파른 절벽위에 서게 됬어요. 높다란 그곳에선
거침없고 시원하게 펼쳐진 수평선이 한 눈 가득히 들어왔지요. 수
평선에 점처럼 떠있는 배들을 눈을 찡그리고 응시하고 있다가, 문
득 무엇엔가 끌린듯, 저는 고개를 숙여 절벽밑을 내려다 봤어요.
그곳엔-
에메랄드 가루를 뿌린것 같은 투명한 블루의 바다가 있었어요.
얼마나 투명했냐 하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어요.
파도가 잘게 부서지는 수면 밑으로 노니는 물고기가 다 보일정
도였으니깐요.
둘려진 암벽사이에 반쯤 갇힌채, 그 바다는 세상의 모든 더러움
에서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수십미터 낭떠러지 아래에 있었는데도, 바다는 그렇게 저에게
가깝게 다가왔어요. 파도가 암벽과 부딛힐때 일어나는 작은 물
거품 소리까지 제 귀를 아스란히 스치고, 튀어오른 물방울이
제 뺨을 적시는것 같았죠.
얼마나 정신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버지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제주도로 돌아가는 배가 도착할 시간이 된
거죠. 돌아가는 길에도 아쉬운 마음에 몇번씩이나 뒤를 돌아보
면서, 그렇게 저는 그 푸른바다와의 짧은 만남을 고해야 했어요.
모든 한국을 뒤져도 그 작은 섬 귀퉁이에만 있을듯한 보석 같이
아름답던 그 바다.
일상으로 돌아온 저에게 그 모습은 기억속에서 흐려져가고 있지
만, 푸르렀던 그 느낌만은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어요.
언젠가, 무엇에 홀린듯이 돌아가게 될 날을 꿈꿔요.
지갑을 털어서 홀린듯이 표를 사고, 홀린듯이 배를 타고, 언덕
을 홀린듯이 올라, 하얀 등대를 지나 절벽 끝에 섰을때,
무엇엔가 끌린듯 고갤 숙여, 그 푸른 바다를 보게 됐을때,
마침내 꿈에서 깨어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
=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