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1학년때 학교에서 댕겨온 일본여행기입니다.
학교숙제로 낸건데.. 지금 읽으니까 감회가-_- 새로워서 한번 올려봅니다..
친구들의 이름이나 별명도 그냥 냅둬버리겠습니다.
어설픈 초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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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컨츄리틱하게도 처음 대한민국땅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설렌다.
눈 앞에 보이는 엄청나게 크고 좋은 배를 뒤로하고 우리는 별로 크지 않고 결코 좋아보이지않는 배 -카멜리아- 에 올랐다.
이등객실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내가 친구놈에게 농담으로 ‘이 배는 3등실이 없고 특등-1등-2등실의 구조를 지닌다’ 고 한 농담이 설마 진짜일줄은 몰랐다.
좁아서 누울자리조차 없어 이불장에 몸의 반을 넣고 자야 하는 것, 그래, 참을만했다.
엄청나게 압박을 가해오는 배 멀미, 역시 참을만했다.
그러나 도대체 몇 주간을 씻지않은것인지 알 수 없는, 놈들의 발냄새만은 참을 수 없었다.
놈들의 발냄새는 화생방훈련을 방불케했다. 아... 정말로 괴로웠다.
그렇게 결코 편하지않았던 잠자리를 정리하고 하선했다.
일본.
내 처음 이 땅에 태어나 그것이 뭔지를 몰랐고, 조금 나이를 먹은 뒤에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사악한 새끼들의 집합소라고 배웠으며, 조금 더 나이를 먹어 그것에 알지못할 엄청난 적개심을 지녔고, 그 후 몇 년이 흐르며 그들의 음악과 문화를 조금씩 알아가며 그런 적개심을 버리고 호감을 갖게되었던 바로 그 곳, 일본.
그 일본땅에 내가 첫 발을 내디뎠다.
“하이, 하이, 하이, 하이, 하이”
왼 쪽 프론트의 이쁘장한 누나가 아닌 어느 칙칙한 할아버지에게 입국심사를 받고있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또한 그 할아버님의 ‘하이’ 연발은 나로하여금 그가 별로 정상인은 아닌듯하다(쉽게 말해 미친놈 같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곧 그것이 일본의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고, 잠시나마 미친사람으로 오인했던 그 할아버님께 ‘쓰미마셍’ 이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버스를 타고 첫 번째 목적지로 이동했다.
진짜로 일본의 거리가 엄청나게 깨끗하고(우리는 12시간이 경과한 뒤 호텔을 나와 거리를 걸으며 쓰레기를 발견할 때마다 반가워해야했다. 1시간동안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발견한 것은 휴지 한 조각과 담배꽁초 두 개피였다. ), 또 지나치게 조용하다는것(일본에있는 동안 차의 클랙션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못했다면 설명이될까)을 피부로 느꼈다.
구마모토 성.
그냥 나를 일본 시내에 내려놓고 니네끼리 갔다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떼놓고 갈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구마모토 성.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구마모토성보다는 일본 여중생들의 짧은 교복치마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했다(맹세코 나는 그런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말이다).
내게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일본인에게 얼굴도 쳐다보지않고 “시끄러” 라는 말을 남긴 뒤 성내를 대충 둘러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아소 활화산.
활화산은, 자랑스러운 나의 거대한 조국 대한민국에는 존재하지않는것이어서 조금은 관심이 갔다.
끊어져버릴것만같은 불안하게 생겨먹은 조그만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이동했으나, 풍향이 안좋아서 분화구를 관찰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뭐 어렵다기보다... 풍향이 우리가 간 날과 같이 불고 있을 때 분화구를 둘러보다간 가스에 질식해 세상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둘러볼 수 없었다.
그 때 어떤 일본인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일본말로 무슨 말을 하는데 뭔말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가이드 형님이 해석 해주시는 내용을 듣자니 바로 앞페이지에 적어놓은 우리가 지금 분화구를 둘러볼 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소산의 분화구 사진을 몇 장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참 고마운 할아버지로군..’
...이라는 생각이 채 가기도전에 가이드 형님의 해석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사진들을 현재 1000엔에 판매하고 있으나 특별히 우리에게만 단돈 500엔에 판매하겠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풍경이 있었다.
“원래 20000원인데 아줌마한테만 15000원에 드릴께요” 라는 말과 함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10000원짜리 물건을 팔아넘기는 동대문시장의 아줌마들.
그렇다.
그는 고도의 판매 테크닉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잡상인계의 대부임에 틀림없었다.
뭐 항상 그렇듯이... 그런 고급 잡상인들에게는 고객이 많다.
30초도 안되서 꽤 많이 들고온 사진모음집들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그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뭐 항상 그렇듯이... 우리 한국인들은 그런 거 기다려주지 못한다.
조금 뒤 슬퍼할 그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사진 몇 장을 찍고 슬슬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담인데 거기서 만난 일본 남고생 중 이인혁군과 얼굴, 헤어스타일, 하는 짓이 똑같은 놈이 있어 나와 나의 친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똑같았다. 사진을 찍지못한 것이 내 평생의 한이 될듯하여 크나큰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숙소 『石松 HOTEL』 이 있는 벳부로 이동했다.
2시간여쯤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우측에 시내가 얼핏 보여 쳐다보니 어느집에선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음.. 어느집에 불났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버스를 타고 가다가 드디어 시내 전경이 눈에 확 들어오는데 불이 난 집이 한 두집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가이드형님의 설명이 이 곳이 벳부며 옆에 보이는 연기들이 싸그리 온천이라고 한다.
이곳은 땅만 파면 사우디에서 석유 쏟아져나오듯 온천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에 가정집에서 필요하면 그냥 삽들고 마당에나가 땅파서 온천을 만든다고하니... 내심 놈들이 아주 쪼금 부러웠다.
어쨌든 호텔에 도착해 온천욕을 즐기니 그것이 예술 그 자체였다.
아주 죽였다.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번 가서 다 벗고 씻어보라.
그럼 알게 된다.
그렇게 온천욕을 끝내고 안에 빤스도 못입게하는 조금 민망한 일본 전통옷을 입은 뒤 식당에 갔다.
입맛에 맞지않아 조금 고생한 뒤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호텔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여를 시내 이곳저곳을 미친개처럼 배회한 뒤, 우리는 편의점에 가서 먹을거를 몇 개 샀다.
난 두 개를 샀다.
110엔짜리 쿠키 한 개(한 통이 아니다. 한 개다. 한 개에 110엔이다.)와 170엔짜리 350ml 음료수를 사고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거의 3천원 돈을 썼다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분노는 곧 있을 사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일본의 문화를 체험해보고자 일본의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택시근처에 가니 갑자기 택시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자동문이었다.
어쨌든 택시에 타고 나의 능숙한(?) 일본어 솜씨로 무리없이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우리는 택시의 기본요금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560엔.
황당했지만.. 뭐 일본이니까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가다보니 갑자기 80엔씩 요금이 마구잡이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880엔.
최종요금이었다.
한국에서 기본요금이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를 9천원을 주고 택시를 탔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했다.
택시에서 내린 뒤 잠시 주머니가 허전해진 여운을 느낀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호텔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텔레비젼을 틀어 일본 쇼 프로그램을 보았다.
생기다만것처럼 생긴 글자들이 자막으로 연신 뜨고 TV안의 일본놈들이 뭐라고 떠들면서 지네끼리 좋다고 웃는데 나는 하나도 즐겁지않아서 답답해 미칠 것 같았지만, 아까부터 보여온 능숙한(사실 대단히 형편없는 일본어 실력이지만 내가 워낙 허풍을 떨어놓은터이고, 또 몇 명의 일본인들과 무리없는 대화를 나눈뒤라 아이들은 나의 일본어 실력을 맹신하고 있었다.)일본어능력으로 자막을 해석해주니(사실 전혀 해석할줄 모르지만 그냥 눈앞의 상황에 대충대충 그럴듯하게 집어넣었다. 엉터리로 읽어가면서.)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재밌게 TV를 보았다-_-...
내가 태어나서 본 침대중 최고로 좋은 매트리스를 가진 침대를 나의 친구들에게 양보하고 나와 다른 친구 한 놈은 다다미위에 요를 깔고 거기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야생원숭이 공원에 들어갔다.
원숭이가 상당히 많았다.
‘상당히’ 라는 말로 표현이 되었을지몰라 덧붙이는데 2000마리라고 한다.
참고로 사육하는게 아니라 그냥 야생의 원숭이다.
뭐.. 원숭이를 그다지 사랑하는편이 아니라 별 미련없이 다음목적지인 다자이후텐만궁으로 이동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역시 볼 건 없었다.
그냥 쭉 둘러보고 일본 남고생들한테 시비도 걸어보고하며 궁내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비교적 입맛에 맞아 밥을 그런대로 맛있게 먹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쇼핑센터였다.
처음에 시내관광인줄 알고 무지 좋아했으나, 알고보니 그냥 쇼핑센터에서 노는거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의 미덕인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일본인’에게 ‘일본어’로 음반점을 ‘직접’ 물어봐 그의 말보다는 그의 제스쳐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 음반점에 들어가 ‘일본인 점원’ 에게 ‘일본어’ 로 ‘직접’ 내가 찾는 CD의 위치를 물어봐 이번엔 그의 말에 ‘하이’ 라고 한 번 대답도 해주며 CD 두 장을 구입했다.(여기서 잠깐. 당시 학교에서 '여행시 외국인과 반드시 이야기를 하고 그 내용을 여행기에 집어넣을것' 이라는 대목이 있어서 지어낸이야기다. 대화는 "Excuse me." "하이." "히데.." "아, 엑스자판노 히데데스까?" "Yes." 가 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슬플정도로 간단했다.)
계산하는 30초동안 일본인 점원의 ‘하이’ 소리를 한 열댓번들으며 상점을 나와 이번엔 친구놈이 가자고 한 서점으로 이동했다.
놈이 그곳에서 40분이라는 시간을 잡아먹고나니 더 돌아다니고 싶어도 시간이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버스에 올랐다.
올때보다는 비쌈직해보이는 배를 타고 창가에 앉아 친구들과 밤새워 포커와 블랙잭을 하며 부산에 도착하는 장면까지 보았다.
그 다음은 역시 지루한 버스여행의 연속이었고, 그걸로 우리의 여행은 끝이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 느낀 것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인지, 아니면 잘 살기 때문에 그런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보다는 훨씬 느긋한 국민성과 친절함, 그리고 깨끗하고 조용한 거리가 뭔가 우리에게 과제를 남겨주는 듯 했다.
정말로 ‘여기서 살고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만큼 좋았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쪽바리’ 라 부르며 무시하고(정말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지만 나 역시 일본에서 그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무시했다-_-), 우리 마음대로 그들을 우리의 라이벌로 치부해버리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한다. 대화테마가 이런쪽으로 흘러가면 자꾸 역사를 들먹이는놈들이 있는데 난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집착해서도 안되는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축구빼고 분명 거의 모든 면에서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에 있다.
어쨌든간에 난 한국인이다.
우리 나라가 일본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살아있는동안은 힘들겠지만.
또, 대한민국이 정말 작은 나라라는것도 느꼈다.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에 지나지않았던 나의 모습에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이제 나의 하루하루는 또다시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의 나날일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보이는 일본의 학생들을 떠올리면 조금은 약도 오르지만, 그래도 표면의 행복만이 전부가 아니라 믿기에 난 행복하다.
녀석들이 느끼지못한 월드컵 4강의 기쁨을 난 느꼈고, 또 녀석들이 누리지못했을 그 어떤 행복을 난 나의 조국에서 누렸기에, 난 행복하다.
이 글이 끝나면 조용한 음악과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땅콩차 한 잔을 마시며 잠자리에 들까 한다.
그래서 이 느낌을 조금은 오래 간직하고 싶다.
짧지만, 꽤 즐거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