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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뭇잎 여행> 일본문화답사기 Day-1
날짜 : 2003년 03월 08일 (토) 4:50:43 오후
조회 : 3324
일본 문화 답사기
Japan Culture Exploring Document
❚ 나뭇잎 여행 - Return to Innocence.
>> Day-1 ꌙ 검은 대양을 건너다.
아침에 일어나니 나의 첫 바다 건너 일본 여행을 반기듯 하얀 함박눈이 곱게도 떨어지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부산히 챙겼던 여행 가방을 다시 확인하고, 아버지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손끝과 발끝은 시릴 정도로 차가워지고, 목 뒤의 힘줄은 빳빳하게 서서 마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먹고 옷을 입었다. 방을 돌아다보니, 5박 6일 동안은 이 방은 텅텅 비어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치 수련회를 떠날 때의 아이처럼 훌쩍거렸다.
왜 이리도 긴장감이 나를 괴롭히는 건지…… 저동 고등학교에 가서 아버지께서 인원 체크를 하실 때에 나는 수없이 떨면서 눈 내리는 회색빛 하늘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선생님, 부산 남해에서는 먼 바다에서 파도가 3~4m나 높게 일고 있다는데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그 정도면 고깃배도 나가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한 학부모께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웬걸, 눈이 오면서 바람도 세차게 부는데 바다라고 날씨가 험하지 않을쏘냐. 촉매를 부은 반응물처럼 나는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추워서 떠는 건지, 긴장해서 떠는 건지.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부딪히면서‘딱딱’소리를 수도 없이 냈다. 한 곳에 이리저리 있지 못하고, 계단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다.
부산 행 버스를 타게 된 것이다.
이번 여행은 한국 교원 재단에서 주관하는 여행으로 작년에도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온 경험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신청하신 이번 여행에서 운이 좋게도 추첨이 되어 일본 규슈 5박 6일 여행에 몸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동 고등학교에서는 40여명의 선배들이 이번 여행에 참가를 하게 되었고, 나도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서 일본 여행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흔쾌한 결정을 내기지 못했었다. 며칠간의 유예기가 있었던 이유는 일본에 대한 비관적 사고관이 컸던 이유였다. 안 그래도 학교에서 일본이 우리에게‘퍼부었던’총알과 반인간적 행위들을“비난하자”고 배우는 판에 전여옥 씨의『일본은 없다.』와 각종 한일 문제를 적은 글들을 읽었던 그 당시 나의 상태는 일본을 비난하기 위해 교육받은 병사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섣불리 일본행 티켓을 받아들지 못했을 수밖에. 그 때 나는 여행 후의 나의 달라진 사고를 짐짓 생각지도 못했었다. 나는 여행을 다녀온 다음에 사람들이 180° 달라진다는 소리는 모두 거짓말인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적극적인 추천에 나는 일본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너울너울 해가 져가는 부산항을 바라보니, 마음 한 구석에는 아쉬움, 반대편에는 설렘이 자리 잡고 있어 심적으로 이래 저래하지 못해 답답하기만 하다. 파도는 소리를 내며 노을빛을 삼키고, 저 멀리 외항부터 차츰 어둠이 풍경을 지워버린다. 고동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어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갑판 위로 올라간다. 사진을 찍으면서 야경을 바라본다. 파도는 내항에서는 아직 요란하게 치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배의 엔진소리에 가려져 나는 암흑만을 응시한다. 배 멀미를 하지 않는 나는 남보다 더 많이 풍경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을 경험하고 만다.
풍경은커녕 바로 앞의 내 손도 내 것인지 다른 이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완전 어둠. 파도와 엔진 소리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 나는 나 안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고독에 빠져 들고는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뚜, 뚜.”
거대한 고동소리가 나를 생각 밖으로 끄집어내고는 선실로 인도한다. 시속 21노트의 속력으로 차고 검은 쿠로시마 해류의 지류를 헤치며 배는 기우뚱거린다. 화장실로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틈에서‘아, 나는 멀미를 안 하지.’하며 기뻐한다.
정말이지 나는 이 배를 탔을 때부터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등실 이라고 함은 본디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침대와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갖추어진 곳을 일컫는 것인데, 내가 탄 여객선은 마치 3등실 처럼 칸막이가 낮은 방이었다. 커다란 방에 있는 낮은 칸막이에 자그마한 TV. 모포와 같은 이불과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옷걸이. 우리나라의 해외여행 선박이 이렇게 초라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만의 이기적인 욕심일 수도 있다. 여행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생을 해야지 그만큼 보고 얻는 것이 많은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좌우로 조금은 심하게 흔들리는 이 배가 밉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배도 이 험난한 바다를 뚫고 하룻밤은 지새워야 하는 딱한 처지에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고마울 수밖에……
배는 마음에 안 들었어도 아버지와 함께 하는 늦은 저녁 식사는 한마디로 일품이었다. 여행 전에 먹는 마지막 한국 음식. 김치가 왜 그리도 맛있는지. 김치찌개와 함께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무말랭이가 식욕을 돋운다. 마지막 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도 특별한 것인지 이제야 알았다. 마음속으로 나마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번 특별한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미를 부여받은 것은 기억에 오래남기 마련이다. 많은 국내 여행 끝에 내가 발견한 유일한 여행의 낙이었다.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을 소중하게 느끼고, 순수해지며 잘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메시지를 그것으로부터 받는다.
다시 나는 갑판으로 나온다. 순간 칠흑 같은 하늘에 박혀 있는 수많은 별들이 나를 경악하게 만든다. 하늘에 저렇게나 많은 별이 있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6천여 개의 별을 모두 본 것만 같은 환희에 빠져서 나는 한동안 고개를 젖힌다.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별이 보이는 곳은 하늘이고, 안 보이는 곳은 배의 연기이다. 다시 검은 바다의 한파가 나의 스웨터를 뚫고 들어온다. 선실로 들어가라는 신호다.
내일이면 새벽 해가 뜨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졸려오는 것이, 마치 봄날에 따끈한 햇살 속에서 히죽거리며 졸려오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
마침내 선실에도 불은 꺼지고 암흑과 함께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나는 꿀맛과 같은 잠에 매료되어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누워서 그냥 생각이 가는대로 기우뚱거리는 선실 안에서 존다. 설렘 때문에 잠이 잘 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서라면 잠은 꼭 자야한다. 떠오르는 해의 빛에 윤곽을 드러내며 일본에 도착할 것이다. 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