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대길
임진년의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이다. ‘입춘’이란 단어 한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벌써 화사한 봄 길을 저만큼 달려가게 한다.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입춘방을 문설주에 써 붙이는 이때쯤이면 어김없이 나의 조부 송우당 할아버님이 생각난다. 참 훌륭한 분이셨다.
할아버님은 설을 지나기 무섭게 불러 앉히시고는 입춘방 쓰는 연습을 시키셨다. 먹을 진하게 간 다음 고작 여섯 살인 손자의 조그마한 손에 붓을 쥐어주시며 당신이 쓰신 본을 따라 연습시키셨다.
글씨일 리가 없지만 쓰고 또 쓰게 하셨다. 연습에 따라 글씨가 조금씩 늘면 칭찬하시면서 다독이셨다. 입춘 전날엔 아끼고 아끼는 한지를 모양 좋게 잘라놓으시고 연습한 것을 쓰라 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삐뚤빼뚤한 게 부끄러울 정도였지만 날이 새자마자 문지방과 기둥과 대문에 붙이셨다. 대문에는 ‘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 기둥에는 ‘堂上父母千年壽 膝下子孫萬歲榮’이란 방을 붙이시고는 기웃거리는 사람에게 “병요가 잘 썼다”라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보는 사람들은 덩달아 “참말로 잘 썼네”라며 칭찬했다.
입춘방은 일 년 내내 붙여있기에 오가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볼 터인데 훨씬 잘 쓰는 형들의 글씨 대신 굳이 어린 손자의 서툴기만 한 글씨를 붙이신 뜻은 철이 들면서야 깨닫게 되었다. 다음에는 형들만큼 잘 쓰겠다는 내면의 다짐을 스스로 이끌어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임을.
할아버님의 깊으신 뜻은 이후 붓을 가까이 하고 학문을 정진하는데 근저가 되었다. 오늘 입춘방을 내다 붙이면서 또다시 할아버님의 뜻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