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른 여덟살의 직장인입니다...
대학은 재수끝에 85년에 입학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합격하자,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휩쓸리지 마라'였습니다.
휩쓸리지 마라....
운동권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저는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휩쓸리고 싶었지만 휩쓸리지 못했습니다.
과격한 학생들이 많기로 손에 꼽히는 대학에서도
가장 과격하다는 사학과를 다녔음에도,
저는 1년만에 선배들 몰래 군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입대한지 사흘 후, 저의 사랑하는 학과동료
여섯명이 구속됐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두달 후에 들었습니다.
휴가를 나온 저에게 그 소식을 전해주며
가슴을 쓸어내리시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속으로는
저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을 두고 있던 부모님들은
다 그러셨겠지만 저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3년 후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지만
저는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제대한 후에도 동료들은 일정정도
저에게 청년학도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여전히 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습니다.
술을 진탕 먹은 어느날 밤, 귀가하는 저에게
아버지는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하시더군요.
그날 저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세요?'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서 저를 조용히 부르시더군요.
아버지는 어디로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술이 덜깬 저를 앞에두고 어머니는 25년간 묻어두셨던
아버지의 과거를 처음으로 제 앞에 풀어놓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부농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동의 자식이란 칭호는
큰아버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대지주의 첩의 자식이었습니다.
대지주의 가족들이 큰 집에서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불릴 때,
아버지는 대지주의 첩과 함께 오두막집에서
호박죽으로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하루 한 끼니를 걱정해야 할 판에도 아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제시대에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사범학교에 합격했습니다.
입학금조차 대줄 돈이 없어 아들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셨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합격한 날 밤, 죽도록 때렸습니다.
그리고 잠이 든 체 누워있는 아버지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밤새도록 흐느끼셨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사범학교 학생은 학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었습니다.
우리 겨레 모두에게 기다리던 해방이었지만,
아버지에겐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고생의 시작이었습니다.
학비가 더이상 지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끝마치면 좌판을 들고 떡을 팔러다녔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학교 청소일도 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댔습니다. 그러나... 힘에 부쳤습니다.
결국 입학 3년만에 중퇴를 하고, 초등교사 자격증을 따서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이 터졌습니다.
모두가 피난을 떠났지만, 몸이 약한 할머니를 두고 떠날 수 없어
결국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군을 만나야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교육을 명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김일성을 가르치고
인공가를 가르쳤습니다.
학교교육을 받지못한 또다른 '첩의 자식'-아버지의 형님은
붉은 완장을 차고 '악질지주'색출과 처형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석달 후, 다시 국군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와 그 형에게는 공산부역자의 딱지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국민들에게는 안심하고 집에 있으라며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쳤던 그들에 의해 아버지는 바보같이
도망치지 못했단는 이유로 모진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그리고 사형언도....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동네사람들이, 아버지가 가르쳤던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형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교사생활은 더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징역 5년형에 형집행정지...그리고는 군에 입대하여
속죄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년만의 제대, 결혼...5남매
아버지는 인쇄소 골목에서 새 일을 시작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곱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가던 어느 날,
이 나라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뒷통수를 쳤습니다.
전쟁중에 공산체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유실됐다며
자진신고하면 방면해주겠다는 공고였습니다.
아버지는 순진하게도 이를 믿고 자진신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잡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요시찰 대상'으로 올려져 경찰의 정기적인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가
일제때도, 해방이후에도 주류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손에 의해
까발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사할 때마다 웃으면서 찾아오는 담당형사에게 차를 대접해야 하는 비참함...
아버지는 이 모든 아픔을 혼자 감내해왔습니다.
88년, 아버지가 회갑때였습니다...
그동안 자식들 때문에 휴가다운 휴가 한 번 가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해외여행 경비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난생처음 어머니와 함께 여행준비를 했습니다.
여권을 신청하고, 옷을 사고...
그런데, 기다리던 여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머니의 여권은 나왔지만, 아버지의 여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안나오지?'하는 막내아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행정에 착오가 있나보지...그깟 외국에 나가서 뭐하냐, 돈만 쓰고..
우리나라에도 가볼 데가 얼마나 많은데...'라고 하셨습니다.
막내아들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여권이 나오지 않은 것은 단지 행정착오가 아니라
아버지의 과거때문이라는 것을...
막내아들은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해외여행을 나가지 못하신 것은 돈때문이 아니라
'공산부역자'라는 딱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달관한듯 내뱉으신 아버지의 말씀속에 절절이 흐르던
아픔의 눈물을 바보같은 막내아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20여년간 인쇄골목에서 눈의 핏줄이 터져 손을 놓으실때까지
필경일을 하시며, 점심은 늘 라면으로 때우시던 아버지...
형과 제가 가끔 일터에 놀러갔을 때 가장 많이 보았던 건
당신 옆에서 퉁퉁 불어터진 채 식어있는 라면이었습니다.
그걸 보고서 이 철부지 아들들이 아버지대신 좋아라 먹을때,
아버지는 안타깝게 지켜보시고 계셨다는 것을
철부지 막내아들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제, 몇일 후면 아버지를 뵈러 갑니다.
아버지는 96년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십니다.
해외여행은 못가보신 아버지지만, 지금은
6년째 여행 중이십니다...
아버지는 이런 나라에 돌아오시기 싫다고 하십니다.
훗날 저희가 모시러 떠나야지요...
지금 아버지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편안한 곳에 계십니다.
그곳에는 부역자라는 딱지도 없고, 부역자라는 이유로
자유를 빼앗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아버지는 지금 하늘나라에 여행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