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시 모음> 강세화의 '겨울 맛' 외 + 겨울 맛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 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히 서려야 맛이다. (강세화·시인, 1951-) + 겨울나기 그래 아무리 밉다 곱다 해도 된서리에 쪼그라들어 비굴해진다 해도 뿌리 하나만큼은 꿋꿋이 뻗치고 있으니 또 어찌어찌 견디게 되겠지 오롯이 살아지겠지 혹독한 겨울을 딛고 한 치라도 더 파고들어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되겠지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겨울나기·2 발길에 차이는 신 새벽 장작불 주위에 모여든 인부들 시린 발 신발 끈 고쳐 매보지만 새벽부터 흩날리는 눈발 불꽃에 떨어져 녹아버리 듯 하루 일당이 날아가 버리고 뒤돌아가는 발길엔 새벽밥 차려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눈발처럼 자꾸 떠올라 시린 가슴 소복소복 쌓이는 아침 길 말없는 발자국들만 그 위에 또 하나의 발자국을 포개고 있다 (이국헌·시인, 1956-) + 겨울나기 멸치 조림에 겨울이 난다면 김치단지에 겨울이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낙동강 물이 기름이라면 하얗게 쌓인 눈이 이불이라면 힘껏 퍼다가 덮어 주련만 작은 단지에 마음만 담아 보았다 겨울이 아니라도 시린 가슴 정이 그리워 시리고 혹한이 서럽다 어머님 날 낳으실 때 배가 아파 우셨나요 소년소녀 가장! (하영순·시인) + 裸木의 겨울나기 찬 서리 내려앉은 가지 위 아침 햇살 잠을 깨 영롱히 비추는 산비알 못 잊을 그리움으로 허공 향해 손짓하는 나무들 시린 발 바라보고 북녘 향해 목쉰 노래로 살아간다 따스한 날 잔디에 뒹구는 꿈 피멍울 들어도 이 강을 건너자. (강대실·시인, 1950-) * 산비알: '산비탈'의 방언. + 딱새와 겨울나기 묵정밭에서 감을 따다 딱새를 보고 나는 문득 가난의 추억에 젖는다 폭설이 내리면 내 창가에 와 배고프다고 푸드덕거리던 너 딱새 인심이 고약한 마을에는 참새가 말라죽는다고 했거늘 그래, 딱새로 세상 오길 잘했구나!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살얼음판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얼음장이 꺼지는 날이면 천지를 모르는 불쌍한 송사리들만 밟혀 죽을 테지! 딱새야 올해도 폭설이 내리면 주저 말고 내 창가로 오려무나 네가 좋아하는 좁쌀이 떨어지면 달걀노른자로 추억을 나누자 너와 나의 봄날을 위해 살아보자! (최홍윤·시인) + 소나무의 월동준비 겨울의 추위를 손짓하는 첫눈이 내린 다음 옹크리고 걷는 솔 숲길에 앞서 걷는 겨울 나그네 늘 푸른 소나무 겉으로 보기에는 묵묵히 변함없으나 짐승들이 철 따라 털갈이하듯 급하게 겨울옷 갈아입느라 몹시도 허둥거린다 한파에 면도날로 찢기는 동파예방을 위해 솔잎 끝으로 열린 물 공급의 꼭지를 잠가 묵은 잎 갈색으로 건조시키어 바람에 하나 둘 떨어뜨려 불필요한 열량의 소모를 최대한 줄인다 내년의 살림을 책임지는 금년에 새로 난 잎은 혹한의 동상에 걸리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보일러를 가동하느라 송진이 관을 타고 오르며 하얗게 땀을 흘린다 세월의 바람을 짊어진 나도 앞서 걷는 선지자의 본을 받아 부질없는 근심의 에너지 깊숙하게 갈무리하며 어디론가 걸어간다 (김내식·시인, 충북 영주 출생) + 겨우살이 살을 에이는 찬바람에 알몸으로 버티며 억척스레 살아가는 겨울나무같이 길고도 길게만 느껴지는 추운 겨울에는 가까스로 살아만 남아도 잘하는 거다. 겨울 너머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철석같은 희망으로 굳센 믿음으로 춥고 괴로운 긴긴 겨울 동안에는 삶의 뿌리 하나 지켜 가는 걸로 충분한 거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