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시 모음> 김추인의 '달팽이의 말씀' 외
+ 달팽이의 말씀
그의 문체는 반짝인다
은빛이다
또 한 계절 생을 건너가며
발바닥으로 쓴
단 한 줄의 정직한 문장
'나 여기 가고 있다'
(김추인·시인, 1947-)
+ 민달팽이
아침 뜨락,
민달팽이 한 마리
풀숲에 엎드려 있네.
먹고 먹히는 난세에
맨살로 태어난 여린 목숨이
아침 이슬에 젖은 채
질경이 풀 섶 아래서
잠을 자는지
꿈을 꾸는지...
(이건청·시인, 1942-)
+ 달팽이의 사랑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김광규·시인, 1941-)
+ 달팽이
땅을 밟고 살던 이들은
어느새 땅을 버리고
차례차례 하늘로 올라섰다
타고 오르거나 걸어 오르거나
더 높이 올라가
참 넓고나 좋구나 중얼거리며
내려다보는 땅은
돈이다 힘이다
길길이 따로 갈라
내 땅이다 우리 땅이다
중얼거리며
좋은 땅 한 뙈기 없이
나는 사는 게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마음밭에다 쇠파리를 날리면
쇠파리 같은 퉤퉤 어떤 달팽이 흥건히
침을 뱉고
(박태일·시인, 1954-)
+ 나도 민달팽이
울진 소광리 계곡에서 민달팽이를 보았다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도 아니고
모래와 나뭇잎으로 집을 짓고 사는 물벌레도 아니며
그저 맨몸으로 기어다니는 민달팽이를 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에 뱃가죽만 단단한,
물먹은 바위 그늘을 따라 기어다니는 민달팽이
알몸으로 더디게 바위 하나를 넘어간다
한때 달팽이를 부러워한 나를 비웃듯
집을 짓고 사는 물벌레를 부러워한 나를 비웃듯
바위 틈이든 낙엽 속이든 머물다 가는 민달팽이
천천히 바위를 넘어간다. 물자욱이 남는다. 이내
햇볕이 물기를 거두며 뒤따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언제나 그 빠르기로 큰 바위 하나를 거뜬하게 넘어간다
집이 없어도, 집을 짓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민달팽이
(안상학·시인, 1962-)
+ 달팽이
기껏해야
시속 12m 남짓 되는
너의 속도를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남들 보기에는
너무 느려 터졌어도
남의 눈치 안 보고
제 갈 길 묵묵히 가는
그저 너다운 생을
어느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한곳에 머무는 생은 싫어
그저 질주하는 삶은 싫어
제 몸을 집 삼아
등에 한 보따리 짊어지고
더듬이로 너른 세상 속
방향을 가늠하며
지금껏 애써 걸어온 길
뒤돌아보지 않고
오체투지의 길을 가는
옹고집의 고독한 유랑자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