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하는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시인, 1964-)
+ 봄에는 온통
실비 오고,
실바람 불고,
실햇살 내리고....
봄에는
온통
가느다란 것뿐이야.
새싹,
제비꽃,
보드라운 나비 날개.....
고 작고 여린 것들
다치면
큰일일 테니 말이야.
(손동연·아동문학가, 1955-)
+ 몸짱 씨앗
요것 좀 봐!
잠자는 척하면서
팔운동
다리운동
숨쉬기운동
부지런히 했던 거야.
안 그러면
이 쪼그만 게
흙덩이를 번쩍
어떻게 들 수 있었겠어?
(이정인·아동문학가)
* 봄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함민복·시인, 1962-)
+ 경칩 부근
견디기 어려워, 드디어
겨울이 봄을 토해 낸다
흙에서, 가지에서, 하늘에서,
색이 톡 톡 터진다
여드름처럼
(조병화·시인, 1921-2003)
+ 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혀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말이 가장 많을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 보게나.
(박재삼·시인, 1933-1997)
+ 봄날
들판엔 아지랑이 피고
공중에 종달새 울면
마당까지 달려온 햇빛은
갓 구운 빵같이 따끈따끈해
바람이 내 맨발을 간질이면
아지랑이 타고 훨훨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어
(이기철·시인, 1943-)
+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봄의 노래
종다리 높은 울음에
모두 잠에서 깨어나기로
약속이 있었나보다
민들레 뽀얀 얼굴.
천사 꿈을 꾸고
마파람 간지러움에
까르르 개나리 웃음소리
아침부터 취한 진달래 보며
장독대 아지랑이 어지럽단다
가만히 있어도 가득 차는 금 빛 아래
생명들의 그림자 놀이
푸른 풀밭에 발돋움하고
수줍게 걸어오는 봄 각시여..
(신현림·시인, 1961-)
+ 봄
멀리서 우리들의 봄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아프게 아프게 온다고 했으니
먼 산을 바라보며 참을 일이다.
가슴에 단단한 보석 하나 키우면서
이슬 맺힌 눈으로 빛날 일이다.
(최종진·신부)
+ 봄꽃을 보니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다 지고 싶습니다
(김시천·시인, 1956-)
+ 다 당신입니다
개나리꽃이 피면 개나리꽃 피는 대로
살구꽃이 피면은 살구꽃이 피는 대로
비오면 비오는 대로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손잡고 싶어요
다
당신입니다.
(김용택·시인, 1948-)
+ 이따금 봄이 찾아와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나희덕·시인, 1966-)
+ 봄과 같은 사람
봄과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아마도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창조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 게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불평하기 전에
우선 그 안에 해야 할 바를
최선의 성실로 수행하는 사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새롭히며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해인·수녀, 1945-)
+ 새들에게
새봄에는 어린 새들에게
새파란 눈 주시고
새봄에는 철없는 새들에게
새파란 털 주시고
새봄에는 뛰노는 새들에게
새파란 부리 주시고
새봄에는 착한 새들에게
새파란 날개 주시고
새봄에는 겁 없는 새들에게
새파란 하늘 주시고
그리고 늙은 나에게는
새파란 말도 주시고
(전봉건·시인, 1928-1988)
+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마을 앞에 개나리꽃 피고
뒷동산에 뻐꾹새 우네
허나 무엇하랴 꽃 피고 새만 울면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