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하나 둘쯤 작은 상처 어이 없으랴.
속으로 곯아 뜨겁게 앓아 누웠던
아픈 사랑의 기억 하나쯤 누군들 없으랴.
인생이란 그런 것.
그렇게 통속적인 일상 속에서
가끔씩 아련한 상처 꺼내어 들고
먼지를 털어 훈장처럼 가슴에 담는 것.
그 빛나는 훈장을 달고 그리하여 마침내
저마다의 그리운 하늘에 별이 될 때까지
잠시 지상에 머무는 것.
(김시천·시인)
+ 상처
칼에 베이면
상처가 밖으로 남지만
사랑에 한 번 베이면
보이지 않는 상처가 가슴에 남는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상처를 지니고 가는 사람이다.
(윤수천·시인, 1942-)
+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정호승·시인, 1950-)
+ 상처
손을 베였다.
책을 잘못 건드렸다.
종이 한 장이 날을 세우고 있다가
내 영혼을 스윽 베어 버렸다.
모가지가 뜨끔했다.
종이에 묻은 핏방울이 지워지지 않았고
글자 몇 개가 붉게 물들었다
내 몸이 다녀간 흔적을 책의 영혼은 가지고 있다
내 영혼이 책을 만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책을 만났다.
그 책 속에 매복해 있던 글자들이
칼을 들고 내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을 때,
종이 한 장이, 기껏해야 종이 한 장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강수·시인)
+ 꿈과 상처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이 절망이구나
(김승희·시인, 1952-)
+ 상처 아닌 꽃은 없다
선운사 뒷마당 동백꽃
눈물 되어
하나, 둘
뚝뚝 떨어집니다
달빛 되어 잘게 부서져 내립니다
그 꽃잎 하도 서러워
잊혀진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알았다면
더 이상 아파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핏자국 선연한 꽃잎자리
한때 사랑했던 기억처럼
깊어져 갈 때
어디서 날아든 꽃잎 하나
냅다 풍경을 칩니다
세상에
상처 아닌 꽃이 없습니다.
(김정호·시인)
+ 시인
제 상처를 핥으며 핥으며
살아가는 사람
한번이 아니라
연거푸 여러 번
연거푸 여러 번이 아니라
생애를 두고
제 상처를 아끼며 아끼며
죽어가는 사람, 시인.
(나태주·시인, 1945-)
+ 상처
밑바닥 상처는 고요한 법이라고
나 어느 날 무심코 중얼거렸네 강물 위
빗방울에 흔들리는 무수한 파문처럼
사소하게 가슴 다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파서 자주 엄살 떨었는데
저 파문 이는 강물의 표면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도 제 힘 다해
빗방울 튕겨내는 걸 보았네
깊은 속내까지는 덧내지 않으려
멈칫멈칫 맺혔다 풀리는 동심원을 보았네
이 사내 저 사내 다 받아주는 작부의 자궁 속에도
딱딱한 각질처럼 굳은 순정 하나는 있어
열리지 않고 끝내 고요하리라
나는 너무 쉽게 가장했나 보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아닌 상처를 들쑤셨더랬네
그 길의 상처에 빚 갚을 일 많았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
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
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네
(강연호·시인, 1962-)
+ 상처
쓰라리지만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물이 타서 굳은
숯덩이, 소금은
슬픔을 아는 까닭에
남의 상처를 아무릴 줄 안다.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안아 올리듯
작은 슬픔은
큰 아픔이 위로하는 것,
그러므로 비록 쓰라리지만
우리
상처는 비누로 씻지 말고
소금물로 씻자.
비누는
쾌락의 때를 벗기는 데
써야 한다.
(오세영·시인, 1942-)
+ 상처
팔꿈치에 난 두드러기
조그만 상처 두어 군데
만지고 만져
덧이 나 번지는 염증
만지고 만지면
결국 성한 곳도 진물이 번진다.
아픈 것은
육신이 아니라
지금 나의 나약한 마음인데
약을 바르고
침을 바르고
만지고 만지다 키우는 상처
병은 육신 속에 있는가
나약한 마음속에 있는가
과거는 영영 나을 수 없는 하나의
상처. 치료할 길 없는 병을 안고
오늘도 나는 끙끙 앓는다
못내 아쉬운 그리움을 운다.
(문병란·시인, 1935-)
+ 상처
참, 나무가 앓고 있다
신음도 없이 표정도 없이
참나무의 허리
그의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진물이 먹여 살리던 식구들을 기억한다
가장의 진액은 그러므로 울음이 아니다
식량이다
나무도 상처가 아물 때
가려움을 느낄까
가려워서 마구 잎을 피우고
가지 흔들어댈까
상처 없이 미끈한 나무가 떨군 열매 믿을 수 없다
가려워서 어디든 몸을 문대고 비비고 싶은
생의 상처여,
낫지 말아라
몸 속의 너를 보낼 수 없다
상처는 기억이고 반성이고 부활이다
(이재무·시인, 1958-)
+ 그의 흉터
흉터는 뚜껑이다
흉터는 자물통이다
흉터는 그로부터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뚜껑 중의 뚜껑,
한 인간을 잠그고 있는 흉터는
아무도 열지 못한다
만능열쇠마저 소용없다, 금고털이도 불가능하다
흉터는 외부에서 열지 못하는 뚜껑이다
흉터는 그의 밀실이다
흉터는 바깥에 열쇠구멍이 없다
흉터는 늙은 수리공마저 포기한 열쇠로 잠겨 있다
흉터 속에 그가
열쇠를 움켜쥐고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
(유홍준·시인, 1962-)
+ 상처에 대하여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복효근·시인, 1962-)
+ 상처 입은 사람을 사랑할 때
깊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그 상처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문제삼는 일이다.
단순히 거기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다음엔 그것으로부터 물러나 있어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혼의 부드러운 빛을 그 상처에 비춰라.
(존 오도나휴·아일랜드의 시인이며 철학자, 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