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를 노래하는 시 모음> 최춘희 시인의 '달팽이 한 마리가' 외 + 달팽이 한 마리가 겹벚꽃 그늘 아래서 달팽이 한 마리 더듬더듬 나무를 기어오른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등짐 진 그의 무게만큼 하늘은 자꾸만 기우뚱 내려앉는데 놀라워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지구를 끌고 가는 힘 (최춘희·여류 시인) +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 들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빌어먹을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한 땀 한 땀 나를 꿰어내던 겨울비의 따가운 박음질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들을 보호해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고영·시인, 1966-) + 덮어준다는 것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였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복효근·시인, 1962-) + 달팽이의 꿈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 않았다 보호색을 띠고 안주해 버림이 무서웠다 힘겨운 짐 하나 꾸리고 기우뚱기우뚱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얼굴을 내밀고 살고 싶었다 속살을 물 위에 싣고 춤추고 싶었다 꿈이 소박하면 현실은 속박쯤 되겠지 결국은 힘겨운 짐 하나 벗으러 가는 길 희망은 날개로 흩어진 미세한 먹이에 불과한 것이다 최초의 본능으로 미련을 버리자 또한 운명의 실패를 감아가며 덤프 트럭의 괴력을 흉내라도 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도 늘 제자리는 안될걸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입으로 깨물면 부서지고 마는 연체의 껍질을 쓰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이윤학·시인, 1965-) + 달팽이는 시들지 않는다 껍질뿐인 나의 집이 이제는 편안하다 창문이 없는 지붕과 사다리가 없는 방이 이제는 친근하다 사방이 거울로 되어 있는 감옥 속에서 나는 무수한 나를 번갈아 입는다 나의 유일한 유희는 언제나 나 자신인 것이다 나의 더듬이는 망가진 안테나, 세상은 나에게 전송되지 못한다 나의 유일한 흡연은 카프카 읽기 나는 해마다 지붕 위에 늙어가는 카프카의 초상을 그린다 나는 비오는 날에만 외출한다 햇살, 하늘, 그리고 직립.... 사람들은 끝이 없는 뾰족한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달팽이는 시들지 않는다 (이경임·시인, 1963-) + 달팽이 3 달팽이 마을에 전쟁이 났다. 아기 잃은 어머니가 보퉁이 등에 지고 허둥지둥 간다. 아기 찾아간다. 목이 메어 소리도 안 나오고 기운이 다해 뛰지도 못하고 아기 찾아간다. 달팽이가 지나간 뒤에 눈물 자국이 길게 길게 남았다. (권정생·아동문학가, 1937-2007) + 달팽이가 말했어 집을 지고 다닌다고? 아니야, 난 지금 부릉부릉 차를 몰고 가는 거야. 내 차는 캠핑카거든. 걸음이 느리다고? 아니야, 난 지금 둘레둘레 세상 구경하느라 그런 거야 난 여행을 무척 좋아하거든. (민현숙·아동문학가) + 정말 걱정되는 것 느림보 달팽이라 놀리지 마. 먹이 찾아 한나절 걸려도 오솔길 너머 구슬냉이밭으로 가고야 마는 걸 어둠밭에 피어난 별꽃과 얘기하러 온종일 걸려 나뭇가지에도 올라가는걸 정말로 걱정되는 건 날개가 있는데도 날려하지 않는 타조, 너야. (오은영·아동문학가, 1959-) + 달팽이 손님 부추 단에서 떨어진 달팽이 여섯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시라, 했더니 밤새 무청 한 줄기 뚝딱 삼키고는 꼬불꼬불 초록 똥 듬뿍 내놓았다 가고 싶은 데로 가시라 풀밭에 내려놓으니 까닥까닥 인사한다 풀잎처럼 상쾌하다 돌아서는 발걸음 (유은경·아동문학가) + 달팽이 -엄마, 달팽이 봐 -나, 바빠 -엄마, 달팽이가 움직여 -나, 바쁘다니까 -엄마, 달팽이 뿔 좀봐 쪼그만 안테나 같애 -귀찮게 굴지마렴. 제발 아, 달팽이 아, 아깝다 엄마도 달팽이를 보면 좋아할 텐데... 어른들은 왜 항상 바쁠까? (이준관·시인, 1949-) + 달팽이·2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 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정호승·시인, 1950-) + 느린 달팽이의 사랑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유하·시인이며 영화감독, 1963-) + 달팽이의 열정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낯설고 두려워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미 시작한 걸음인 걸 도전하는 거야 산다는 건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니까 숨이 차게 힘든 날도 있겠지 도망가고 싶은 숨막히는 순간도 닥치겠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앞에서도 가슴에 품은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거침없이 가는 거야 한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아갈 거야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은 이겨내고 말 거야 위기는 숨어 있던 잠재력을 확인할 멋진 기회이기도 해 혼자 가는 길에 동지도 생기고 친구도 사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린 조금씩 닮은 존재들이야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비슷한 일인 걸 얼마나 멀리 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높이 올랐는가 자랑할 게 아니야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거야 우리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 아직은 멈출 순 없어 (작자 미상) +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김신용·시인이며 소설가,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