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바람에 빨래 펄럭이는 날
나는 걸레가 되고 싶다
비굴하지 않게 걸레가 되고 싶구나
우리나라 오욕과 오염
그 얼마냐고 묻지 않겠다
오로지 걸레가 되어
단 한 군데라도 겸허하게 닦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감방 닦던 시절
그 시절 잊어버리지 말자
나는 걸레가 되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더러운 한평생 닦고 싶구나
닦은 뒤 더러운 걸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못견디도록 헹구어지고 싶구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걸레로 태어나고 싶구나
(고은·시인, 1933-)
+ 참 어려운 일
걸레가 되는 일이다
너도
나도
더럽다며
멀리해도
내가 쏟은 김칫국물
현수가 쏟은 먹물
제 몸 던져
닦아내는
걸레가 되는 일이다
걸레가 지나간 발자취
반짝!
빛난다.
(오은영·아동문학가, 1959-)
+ 걸레 보시(報施)
나의 육신을 덮어
그 몸 헤어질 때까지
추위와 염치를 가려 주시더니
그래도 부족하여
이리 저리 가위질 당하고도
지저분한 모든 것
깨끗이 닦아주는 그 공덕
당신의 전생은
나의 원수이시었나!
무슨 업보 그리 많아서
나를 낳으시고
길러주시는 부모가 되시었나!
아버님!
어머님!
(우보 임인규·시인)
+ 눈물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그 안에 삶이 있다.
굳이 피하지 말라. 슬픔을…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방을 비우고 걸레로
구석구석 닦는다.
내일은
우리들의 축일祝日 아닌가.
(오세영·시인, 1942-)
+ 걸레에 관한 명상
행주가 바닥에 떨어지면 걸레가 될 수 있지만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부뚜막에 오를 수 없다
처음부터 걸레가 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부뚜막에서 떨어지고부터 바닥이 더 지저분하다는 것을
행주보다 걸레가 더 흠쳐 낼 것이 많다는 것을
마른 걸레든 진 걸레든
행주보다 더 깨끗하게 빨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걸레 감으로는 비단보다 무명이 더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 눈에 한 번 들어보지도 못하고
걸레 같은 놈 한 번 돼보지도 못하고
조각 천 너무 작아서
무명 조각도 못 되어서
(김문억·시인)
+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 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김사인·시인, 1956-)
+ 환한 걸레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 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 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김혜순·시인,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