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떨며 다가서는
저 무성한
성숙의 경이 앞에서
보라.
만남이 이루는
이 풍요한 여름의 기적.
(유자효·시인, 1947-)
+ 여름밤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이준관·시인, 1949-)
+ 비 개인 여름 아침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김종삼·시인, 1921-1984)
+ 여름방
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앉아
바람을 방에 안아들고
녹음을 불러들이고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 떠있는
저 佛岩山마저 맞아들인다.
(김달진·시인, 1907-1989)
+ 여름날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신경림·시인, 1936-)
+ 여름밤
저녁 먹자 초승달이 아까워
사립문 닫고 더위에 누웠네
하늘 맑으니 모기가 귓가를 지나고
별 흩어지니 거미가 처마로 내려오네
박꽃은 하얗게 피고
국화잎은 점점 커지네
이웃집 아이 달노래 부르는데
그 가락 어찌 그리 간드러진지
(유금·조선의 시인이며 실학자, 1741-1788)
+ 한여름 새벽에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 몇 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박재삼·시인, 1933-1997)
+ 쓸쓸한 여름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 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나태주·시인, 1945-)
+ 초여름의 꿈
긴 겨울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홍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 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일러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황동규·시인, 1938-)
+ 여름밭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문태준·시인, 1970-)
+ 여름 한철
동백나무 묵은 잎 위에
새 잎이 돋는 동안
아침 창가에서 시를 읽었다
난초잎이 가리키는 서쪽 산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다
백작약 뿌리를 다려 먹으며
견디는 여름 한철
작달비* 내리다 그친 뒤에도
오랜 해직 생활에 찾아온 병은
떠날 줄을 몰랐다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띠구름 속에 떴다 지는 까마득한 별 하나
(도종환·시인, 1954-)
* 작달비 ㅡ 장대비
+ 감각
푸른 여름날 저녁 무렵이면
나는 오솔길로 갈 거예요
밀잎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며
꿈꾸는 사람이 되어
발치에서 신선한 그 푸름을 느낄 거예요
바람이 내 맨머리를 흐트러뜨리도록
내버려둘 거예요
나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끝없는 사랑이 내 영혼 속에서
솟아오를 거예요
그리고 나는 멀리 떠날 거예요
아주 멀리 마치 보헤미안처럼
자연을 따라
마치 그녀와 함께 있는 듯 행복할 테죠.
(랭보·프랑스 시인, 1854-1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