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더 먹기 전에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 소박한 꿈으로
가슴에서 풀꽃처럼 자라고 있다
아주 추하지 않도록 단아하게 한번쯤은
머리도 길게 길러보고 싶고
짧은 미니스커트에 몸에 붙는
옷도 입어보고 싶다
젊음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이를 먹은 뒤에 해야 하는 일이
분명 따로 있을 텐데
아직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남을 위한 희생의 땀도
뚝뚝 흘려 보고 싶다
가끔은 내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건망증에 또 한번 칼바람으로 다스리며
나이를 더 먹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들을
겨울이 내 나이만큼 깊어가는 지금
부서지는 삶의 아픔들과 함께
다시금 곱씹어 본다
(이운학·시인)
+ 육순의 문턱에서
아주 낯선
처음 찾아온 손님같이
육순이 문지방을 넘어섭니다.
어쩐다
허나 얼른 마음 고쳐먹고
중얼거리듯 말합니다.
"어서 오시게나
오실 줄 알았네"
(문종수·시인)
+ 단 하나의 소원
사람이 육십대에 들어서면
사형선고를 받을 사람들 대열에 끼고
칠십 줄에 들어서면
사형 집행을 받을 사람들 대열에 낀다고들 하는데
지금 나는 날로 그 날짜가 궁금해진다
아, 칠십 평생을 달음박질로 살아온 것 같은 인생,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
칠십 평생을 공연히 그리 바쁘게 살아왔을까
떠남을 거듭하며 살아온 생애,
실로 나의 인생은 오해, 와 포기, 와 도피, 와
이별, 과 고독.
그 순수고독을 살아오며, 그 순수허무를
같이 살아온 거다
지금 이 자리 아무런 후회는 없으나
칠십을 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날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형집행을 받을 그 날짜만이다
어머님, 저는 지금 기진맥진
단 하나 소원으로, 어머님 곁에 와 있습니다
확, 단숨에 집행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조병화·시인, 1921-2003)
+ 생일파티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서른 살 나는 첼로였다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잘 길든 사내의 등어리를 긁듯이
그렇게 나를 긁으면 안개라고 할까
매캐한 담배 냄새 같은 첼로였다네
마흔 살 땐 장송곡을 틀었을 거야
검은 드레스에 검은 장미도 꽂았을 거야
서양 여자들처럼 언덕을 넘어갔지
이유는 모르겠어
장하고 조금 목이 메었어
쉰 살이 되면 나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어
오히려 가볍겠지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기고
모든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반은 없는
쉰 살의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
기도는 공짜지만 제일 큰 이익을 가져온다 하니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나 할까
(문정희·시인, 1947-)
+ 노년의 입구
아름다운 곡선이 靜物로 보였을 때
노년의 입구에 당도하였다
가령 아내의 가슴이
여인들의 다리가 실물보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였을 때 나는
노인이 된 것이었다
아직 세상에 오지 않은 손자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논리는 양비론으로 바뀌고 세상의
어린것들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이었다
노년의 시는 일용할 양식이다
몽상은 달콤했다 꿈은
부정기적인 그리움을 재연하고
진실한 것은 생몰의 연대뿐,
새는 길을 지우며 간다
(최병무·시인, 1950-)
+ 무서운 나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그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이재무·시인,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