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삶에 관한 시 모음> 신혜경의 '사람' 외 + 사람 한문수업 시간 정년퇴임 앞둔 선생님께 제일 먼저 배운 한자는 옥편의 첫 글자 한 일(一)도 아니고 천자문의 하늘 천(天)도, 그 나이에 제일 큰 관심사였던 사랑 애(愛)는 더더욱 아니고 지게와 지게작대기에 비유한 사람 인(人)이었다 마흔을 훌쩍 넘은 지금도 사람 인(人)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등 기대고 있는 한 사람이 아슬하다 너와 나 사이가 아찔하다 (신혜경·시인, 1963-) + 사람 사람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사람으로 살아보니 그랬다 (신광철·시인) + 밥알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이재무·시인, 1958-) + 장작불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는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 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 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 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 붙지 않으면 쓸모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도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백무산·시인, 1955-) + 위로 받고 싶은 맘 가을걷이 끝난 휑한 들판에 어깨와 어깨를 비비며 서 있었다 위로 받고 싶은 맘 다 안다고 니 등 내 등 서로 토닥이며 서 있었다 위로 받고 싶은 맘 내게 있다면, 내가 먼저 너를 위로하리라 갈대꽃 하얗게 속삭이며 서 있었다 웬수야, 너도 이리와 봐라 사랑은 이런 거다 니도 와서 니 슬픔을 비벼보아라 갈대꽃 눈雪빛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홍수희·시인) + 홀로 무엇을 하리 이 세상에 저 홀로 자랑스러운 거 무어 있으리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는 거 무어 있으리 흔들리는 풀잎 하나 저 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서있는 돌멩이 하나 저 홀로 서있는 게 아니다 멀리 있는 그대여 행여 그대 홀로 이 세상에 서있다고 생각하거든 행여 그대 홀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우리 함께 어린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밥그릇 속의 밥알 하나 저 홀로 우리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사랑하는 대상도 없이 저 홀로 아름다운 사람 있을 수 없듯 그대의 꿈이 뿌리 뻗은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며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나니. (홍관희·시인, 1959-) + 사랑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굳게 만나 말 못하는 내가 그대의 다리가 되어 주고 걷지 못하는 그대가 나의 입이 되어 준다면 지평선 너머까지라도 가고픈 길을 우리는 하고픈 말을 하면서 갈 수 있겠네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만나 팔 못쓰는 내가 그대의 길이 되어 주고 앞 못보는 그대가 나의 팔이 되어 준다면 빛이 들끓는 그 곳까지 가고픈 길을 우리는 보고픈 것들을 보면서 갈 수 있겠네 그대의 어려움이 나의 사랑으로 풀리고 나의 어려움이 그대의 사랑으로 풀리며 우리가 굽힘없이 한 길 되어 꿋꿋이 나아간다면 척박한 이 세상도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겠네. (홍관희·시인, 1959-) +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내리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눈이 내렸네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도 오늘은 낯익은 사람이 되네 오래 써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들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면 모두들 내일을 기약하고 밤에는 별이 뜨리라 말하지 않아도 믿었네 집들이 안녕의 문을 닫는 저녁엔 꽃의 말로 인사를 건네고 분홍신 신고 걸어가 닿을 내일이 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네 불 켜진 집들의 마음을 나는 다 아네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네 (이기철·시인, 1943-) + 얼음 강은, 겨울 동강은 자신을 사이에 둔 마을과 마을을, 강의 이편 저편 마을로 나누기 싫었던 것이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길은 끊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도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어린아이들도 괜히 강 건너 서로를 미워하며 돌을 던지거나 큰소리로 욕이나 해대며 짧은 겨울 한낮을 다 보내는 것이 슬펐던 것이다 하여, 강은 지난밤 가리왕산의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불러 제 살을 꽝꽝 얼려버린 것이다 저 하나 육신공양肉身供養으로 강 이편 마을들과 강 저편 마 을을 한 마을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정일근·시인, 1958-) + 사람을 쬐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유홍준·시인, 196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