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 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난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 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공석진·시인, 경기도 송탄 출생)
+ 일기예보
내게 우산 같은 아내가
아침 화를 냈다
어젯밤 늦은 건
벌레 먹은 하현달이 슬퍼서
떨어진 달빛 부스러기가 서러워서
자작 술에 시간을 타서 마신 탓인데
아내여, 오늘 날씨는
기압골 영향으로 후텁지근하겠고
안개에 가려 한라산이 잘 보이지 않겠으며
바람이 약간 세고
탑동바다 물결이 높게 일겠음
밤에는 소나기가 왔다갔다 하겠으니
우산을 안 가진 사람은 일찍 귀가하는 게 좋겠음
(양전형·시인, 제주도 출생)
+ 일기 예보
아홉 시 뉴스는 보지 않아도
일기예보는 꼭 봐야지
밑천은 한 몸뚱이라던데
감기에 걸리면 쿡쿡,
그 꼴 좋겠네
아홉 시 뉴스는 보지 않아도
팬더의 재롱은 꼭꼭 봐야지
대나무 씹는
오물오물 고 귀여운 입술,
웃음을 까먹지 말아야겠네
아홉 시 뉴스는 보지 않아도
서해안 식인상어 얘기는
놓치지 말아야지
5월이면 으흑 피 냄새 따라
슬금슬금 쫓아온다던데
무릎의 피도 감춰야겠네
뉴스는 아예 보지 않아도
보고싶은 뉴스는 꼭꼭 봐야지
자칫 잃어버릴 따스한 가슴
눈물 한 점 뚜욱 떨어뜨리면
내사 다시 뜨거워지고 싶은 걸
아아, 냉동고 속에 쳐 넣은 심장
다시 꺼내어 살펴봐야지
잘 있었니?
그간 무고하였니?
아홉 시 뉴스는 보지 않아도
진복팔단은 꼭꼭 읽어봐야지
거리를 나서면 뙤약볕 아래
기다렸다 졸졸 따라나서는
아, 강아지 같은 슬픔이여......
(홍수희·시인)
+ 한파주의보
동안은 숨 쉬는 데 너무 충실하였네
그대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가는 기척도 듣지 못했어
비로소 세상에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내 마음에도 거꾸로 매달린 고드름이 보일 즈음에야
그대 다녀간 발자국이 어름어름 눈에 비치네
잊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유리창을 덜컹대며 문을 열어라 하네
(홍수희·시인)
+ 한파주의보
섬그늘
꽁꽁 얼어붙은 대지 위로
뽀하얀 잔설이 수를 놓고
겨울 내내 영하15도의 한파주의보
어제 쪼잘대던 버드나무 위 까치는
밤새 괜찮은지?
노천 논 위의 스케이트장은 아이들의 세상
넘어지고 넘어져도 신나는 세상
전동차 객실 난방은 1050W 모두 틀어도
춥다고 아우성이다
지금은 한파주의보 발령 중!
얼어붙은 대지와 움츠린 사람들의 얼굴에
따스한 햇살 비추는 그 날
들판에서 한파와 시름하는 들풀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시험하고 있다.
(윤용기·시인,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