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관한 동시 모음> 박소명의 '기다려주기' 외 + 기다려주기 할 일 못다 한 여름 뒤에서 가을은 가만히 걸음을 멈추어요. 매미 울음 걷느라 이리저리 훗훗한 바람 담느라 허둥지둥 급해진 여름을 위해 가을은 살며시 언덕에 걸터앉아요. "찬찬히 해." 가을은 뒤돌아보는 여름에게 보오얀 쑥부쟁이 한 송이 꺼내 흔들어 주어요. (박소명·아동문학가) + 맑은 날 가을은 저 혼자서도 잘 논다. 앞으로 나란히 나란히 줄지어 선 옥수수들에게 -어디 보자, 뻐드렁니가 났나 안 났나? 치과 의사 같은 햇볕이 찾아가 들여다보기도 하고 심심하면 아무 곳에나 고추잠자리 떼를 풀어놓기도 한다. 가을은 그렇게 가을끼리 잘 논다. (손동연·아동문학가, 1955-) + 새 손톱 한여름 무더위가 물러갑니다. 설렁설렁 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손톱에 들인 발간 봉숭아 꽃물이 물러납니다. 초승달 하얀 세 손톱이 돋아납니다. (이상교·아동문학가, 1949-) + 가을 하늘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윤이현·아동문학가) + 가을 하늘 옹달샘에 가라앉은 가을 하늘. 쪽박으로 퍼 마시면 쭉--- 입 속으로 들어오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손광세·아동문학가, 1945-) + 해바라기꽃 벌을 위해서 꿀로 꽉 채웠다. 가을을 위해서 씨앗으로 꽉 채웠다. 외로운 아이를 위해서 보고 싶은 친구 얼굴로 꽉 채웠다. 해바라기 꽃 참 크으다. (이준관·아동문학가) + 무 가을볕이 따갑다. 모자 위에 흰 수건을 덮어 쓴 아주머니들이 쑥쑥 무를 뽑는다. 그 동안 아프지 않고 얼마나 싱싱하게 잘 자랐는지 목이 말라도 얼마나 잘 참고 참다운 무가 되었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쓰윽 흙을 닦고 한 입 베어먹고는 살짝 웃으신다. (정호승·시인, 1950-) + 가을 숲 "엄마 내려가도 돼요." 열매들이 나무에서 묻고 있어요. "단단히 익었니?" "예!" "예!" "예!" 대답 소리 들려요. "뛰어내릴 자신 있니?" "예!" "예!" "예!" 대답 소리 들려요. -톡! -톡! -톡! ...... 열매들이 뛰어내려요. "겨울 동안 콜콜 잠자야 한다." 열매를 덮어 주려 지는 나뭇잎. (신현득·아동문학가, 1933-) + 가을 나무 잎도 열매도 떠나 보내고 이제 할 일이 없어 조용하겠다. 나를 쳐다보는 모든 이의 눈빛이 그랬습니다. 허나, 잎이 떠난 자리에 열매가 떠난 자리에 햇볕이 화안하여 더욱 허전한 그 자리 둘레 둘레 싸늘한 바람이 일어 아픔이 더해지는 그 자리에 겨울이 오기 전 꼭꼭 바느질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빛은 가을빛은 녹아서 단맛이 된다 사과 속에서. 가을빛은 녹아서 향기가 된다 국화 속에서. 어머니 눈빛은 녹아서 사랑이 된다 내 가슴속에서. (정현정·아동문학가, 1959-) + 가을 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혼자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기러기떼 날아간 뒤 잠든 하늘에 둥근 달님 혼자 떠서 젖은 얼굴로 비치어도 비치어도 밤은 안 깊어. 지나가던 소낙비가 적신 하늘에 집을 잃은 부엉이가 혼자 앉아서 부엉부엉 울으니까 밤이 깊었네. (방정환·아동문학가, 1899-1931) + 절간 암자는 구름을 이고 조는 듯 한가롭고 가을빛은 너무 고와 타는 듯한 노을인데 뽀르르 다람쥐 한 마리 놀다 간 빈 뜨락 부처님 닮으신 스님 부처님처럼 앉았다가 착한 아기 왔다면서 주시는 머루 한 송이 까아만 알알에 서린 전설 같은 산내음. (정석영·승려 시인) + 풀벌레 핸드폰 가을 풀숲에 풀벌레가 핸드폰을 숨겨 두었다. 찌르르 찌르르 호르르 호르르 삐리리 삐리리 핸드폰을 받으려고 가만 다가가면 뚝 끊어버리는 번호도 알 수 없는 풀벌레 핸드폰 언젠가 꼭 통화하고 싶은. (이경숙·아동문학가) + 풀벌레 소리 풀벌레들이 숙제를 한다 구구단을 외우고 동시를 외고 애국가를 사절까지 부르고, 또 부른다 밤새도록 저러다간 낼 아침 지각하겠다 (고미숙·고전 평론가, 1960-) + 수북수북 길가에 가랑잎이 수북하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발 밑에 수북하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무릎까지 수북하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귓속까지 수북하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온몸에 수북수북하다 (신형건·아동문학가, 196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