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찌푸린 일상에
그만 지친 그대여
이제 편히 쉬어도 좋다
(김병훈·시인)
+ 소주(燒酒)
술 한잔 마시는 데에
너무 많은 의미는 지겹다.
둥글둥글 살자는 세상이
너무 많이 기울어 있으니
세상에 한결같은 건
소주 맛을 쳐줄까.
도시에 내린 어둠은
너무 오래 잠을 자고
이리 저리 얽힌 매듭이
너무 깊이 조여 있구나.
우리는 소주맛에 빠져
마냥 젖어나 볼까.
(강세화·시인, 1951-)
+ 막소주라도 한 잔
막소주라도 한 잔 처억 걸치고 나면
한오백년이나 어랑타령 같은 노래 듣고 싶어진다.
젊고 이쁜 여자가 아니라 얼금뱅이* 중년 여자
조금은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듣고 싶어진다.
(나태주·시인, 1945-)
* 얼금뱅이: 곰보, 마마자국
+ 안동소주
이 풍진 세상을
아무리 아모리
저 세상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해도
때없이 맞닥치는
겨울비 같은 좌절과 낭패를
들켜지고 마는 굴욕과 수모 …를
불싸질러 흔적 없이 사루어주는
45도 화주 안동소주
사나이의 눈물 같은
피붙이의 통증 같은
첫사랑의 격정 같은
내 고향의 약술 그 얼로 취하여
이 풍진 시대도
저 시대의 너털웃음 웃어가며
성큼성큼 건너뛰며 나 살으리.
(유안진·시인, 1941-)
+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시인, 1960-)
+ 소주병
나는 소주병을 보면
연어가 알을 낳고 죽어가는 생각이 자꾸 든다
입과 항문이 하나인 이 소주병이
제가 먹은 제 속을 다 비워주고
푸른 외눈을 뜨고 누워 있는 것이
남대천 바닥에 누워있는 연어와 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가 그 먼 바다에서 회귀할 때는
알에서 깨어나기 前, 다시 이곳에 돌아와
속을 다 비워주고 죽어야 함을 배웠을 것이다
이 푸른 소주병 속에는 연어의 그런 고집이 숨어 있다
속을 다 비워주는 그 푸른 고집을 앞세워
연어가 회귀하듯 걷다보면
이 세상이 갈지(之)자로 움직인다
남대천 연어도 갈지자로 그 먼 길을 회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귀할 수가 없다
이 푸른 소주병 속에는
연어가 회귀하는 갈지(之)자가 숨어 있다
이 세상을 연어처럼 살아가라고
(임영석·시인)
+ 소주병
스스로 말문 열어본 적이 없다
늘 파다한 소문 옆에 있을 뿐
얇아진 호주머니와 노동의 사회학과
보수총액이 아니라 실수령액이 아니라
말이 잘리고 가슴들 화통 앓는
풍경 속에서
흔들리면서 고개를 꺾으면서
내 허전한 입구 물고 벙어리가 되고 마는 이들
오장육부 게워내고
메아리도 없는 소음에서
결국 뿌리 없는 고요에서
텅 빈 뱃심으로 콧노래 불러보는 꿈만 지닌 사람들
그들의 입술에서 목젖에서
뒷간에서 선짓국 집에서
부아가 치미는 핏발 선 눈으로
하나 둘 내 뚜껑을 열던 사람들
내가 싸한 냄새 풍겨 시작된
그들의 희로애락이
오뉴월 세참 시간 밭고랑에서
떠돌이 봇짐 속에서
언제나 마무리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반문한다
내가 말문 열면
정말 세상은 뒤집어지는가를
(천봉현·시인)
+ 소주 한잔
소주 한잔 부어놓고
歸天한 자네 생각하니
달근한 맛 옛날 같지 않네.
언제쯤 다시 만날까 하여
바닥난 소주잔 들여다보니
네놈 얼굴이 어리어
또 술잔을 채워도
함께 마주할 날
다시 또 나눌 수 없으니
일찍 간 자네가 서러울까 생각해도
남아 있는 내 모습이 더 서럽네!
(최상고·시인)
+ 소주에 관한 짧은 詩
수인선 지하철이 휘돌아 오면서
건너편에 서있는 너의 모습이
차창에 깎여 나갈 때
나는 계단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정하게 손 흔들어 주지 못하고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驛舍를 나서면서
씁쓸한 소주가 생각나
바람과 함께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투명하게 출렁이는 소주는
너처럼 차갑게 내 안으로 들어와
조그만 불씨로 모닥불을 피운다.
너에게 깊이 취했던 것처럼
소주에 깊이 취한 내 안에서
파도가 출렁이고 작은 木船 하나가 위태롭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흔드는 것은
창백하다 못해 차가운 너였다고
말하지 않겠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아직까지
나를 흔드는 너는
이젠 세상까지 흔들고 있구나.
(다울 김성수·시인)
+ 소주 같은 사랑
내 젊은 시절의 사랑은
풋풋한 레드와인의 맛처럼 지나갔다.
은빛 갈고리 깊숙이 넣어
조심스레 코르크 마개를 열면
맑은 글라스에 떨어지는 선홍빛 방울
그 향기는 달콤하고 뒷맛은 떫었다.
내 뜨거운 시절의 사랑은
시원한 맥주의 맛처럼 지나갔다.
뚜껑만 따면 펑하고
하얀 거품으로 쏟아져 나와
쉽게 갈증을 채울 수 있었지만
한 번 열린 맥주는
아무리 꼭꼭 닫아도 김이 새 버렸다.
아직 나에게 사랑할 힘이 있다면
이제 소주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소주는 빛깔도 향기도
솟아오르는 거품도 없지만
탁 쏘는 맛에 취하는 것 하나는 확실하니까.
유통기간이 따로 없으니
조금씩 마시고 남겨 두어도
변질될 염려도 없고.
(한승수·제주의 서정시인)
+ 태하 등대지기와 소주 - 등대 이야기·33
당신은
간밤에 소주만 드시데요
삼 년이 지난 여성지를
표지가 닳도록 읽어도 세월은 닳지 않는다며
그 잡지를 또 찾데요
광고문까지 다 외웠다며 찢어진 표지처럼 웃데요
지식이 늘지 않는 대장에 소주만 붓고
시인들은 언제 소주를 마시느냐 묻데요
파돗소리 때문에 귀가 멍들었다며
후비던 귀는 손보다 크데요
당신은 시를 쓸 가능성이 있다 했더니
시는 소주보다 싱겁다며
다음에 올 적엔 시집은 그만두고
소주만 가지고 오라 하데요
(이생진·시인, 1929-)
+ 참소주를 마시면
수성못 옆 포장마차에서
참소주를 한 잔 마시면
여인이 여인으로 보인다.
두 잔을 마시면
여인의 이야기가 들리고
석 잔을 마시면
나의 말문이 트이고
넉 잔을 마시면
여심이 보이고
다섯 잔을 마시면
여인의 가슴이 크게 보이고
여섯 잔을 마시면
여인의 표정이 보이고
일곱 잔을 마시면
여인의 얼굴이 술잔에도 보이고
여덟 잔을 마시면
숙박시설의 상호가 큼직하게 보이고
아홉 잔을 마시면
수성못이 바다로 보이고
참소주 열 잔을 마시면
여인과 또 다른 사연을 만든다.
(김종환·의사 시인, 1951-)
+ 날 부르려거든
날 부르려거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지 말고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 말해 주오
좋은 술집, 비싼 술집이 아니라도 좋소
시장 안, 꼭 시장 안이 아니라도 좋소
돼지국밥집이나 순대국밥집이면 더욱 좋소
술을 사겠다니 부담이 없어 좋지만
주머니엔 술값을 넣어 가지고 나가겠소
마시다 보면 술값은 내가 낼 수도 있고
아니면 2차를 내가 내더라도
그게 술 마시는 기분 아니겠소
한 잔이라고 했지만
한 병씩은 마십시다 그려, 그리고
기분이 동하면 한 병 더 시킵시다
혹시,
술값을 내가 내어도 나무라지는 마오
술 사려다 대접받으니 그대가 좋을 것이고
대접받으려다가 내가 대접을 했으니
내 기분도 좋을 것이라오
날 부르려거든
그냥,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만 하소
어제 과음했어도 나가리라
내일 과음할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엔 나가리라.
(김종환·의사 시인, 1951-)
+ 몸 성히 잘 있거라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권석창·시인, 경북 순흥 출생)
+ 소주 한 병과 노숙자
가을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물기 축축이 베어나는
지하도 계단 모서리에 쭈그리고 앉아
김 오르는 사발 면을 앞에 두고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
돈이 없었을 텐데 착한 이가 건네었나
깍지 않은 수염
감지 않은 머릿결
수염을 깍지 않아도 되고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되는 곳에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소주를 마신 것은 그가 아니라
그 인생이 마신 것이었다
한 병의 소주를 앞에 두고
평생을 부어내어도 다 쏟아지지 않을
허기진 인생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기아(饑餓)에 대한
욕심덩어리를 버리고
사발면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넉넉한 식탁을 꾸미며
그것만이 필요한 것이라고
여분의 길이 남아 있지 않듯
그렇게 사는 것이 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 곳에 있었다
(황라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