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대의 풍경이 되어 주리라
그대 갈매기 되어 날아가면
나 잔잔한 바다 되어 함께 가고
그대 비를 맞으며 걸어가면
나 그대 머리 위 천막 되어 누우리라
그대 지쳐 쓰러지면
나 바람 되어 그대 이마 위 땀 식혀 주고
여름 밤 그대 잠 못 이뤄 뒤척이면
방충망 되어 그대 지켜 주리라
눈이 와서 그대 좋아라 소리치면
난 녹지 않는 눈 되어 그대 어깨 위에 앉고
낙엽 떨어지는 날 그대 낙엽 주우면
난 그 낙엽 되어 그대 책 안에 갇히리라
그렇게 언제나 그대 있는 곳에
나 그대의 풍경이 되어 주리라
(여경희·시인, 1972-)
+ 당신의 꽃
내 안에 이렇게 눈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이에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김용택·시인, 1948-)
+ 빈들
밥풀 같은 눈이 내립니다
빈 들판 가득 내립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당신으로밖에는 채울 수 없는
하얀 빈들을 거머쥐고 서서
배고파 웁니다.
(김용택·시인, 1948-)
+ 강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편지가 있습니다
너무 길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를 저는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박남희·시인, 1956-)
+ 사랑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정호승·시인, 1950-)
+ 긴급체포
당신을
체포합니다.
당신은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온통 내 마음을
빼앗아갔고
당신은
허락 없이
내 마음속 깊이
무단 침입하였으며
당신이
내게 남겨준
사랑의 편린으로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하였고
당신이
그리워
긴 밤을 꼬박 새운
내 몸을 상해하였으며
당신은
타인 앞에서
당당하던 내 위상을
초라하게 추락시켰고
당신은
혼미케 하는 미소로
당신 없이는 살아갈 의미 없는
평생 헤어날수 없는 중독을 시켰으며
결정적으로
당신의 심연한 눈동자에
나를 익사시킨 살인죄로
당신을 긴급체포합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긴급
체포합니다.
(공석진·시인)
+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로 부서진다 해도
아깝지 않을 거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부서져서
하얀 포말로
그대의 발치에 머무른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랑
아낌없이 주고 남은 재처럼
거룩한 사랑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완전하고
비로소 한몸이 될 수 있는 것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한 그루 나무로
그대 안에서
고이 숨을 쉴 수 있기에
(윤수천·시인, 1942-)
+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이라면
그 중 하나는
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이라면
그 중 하나는
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뿐이라도
그는 바로 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까닭일 겁니다
(문은희·시인)
+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 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아직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 당신도 언젠가 저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성미정·시인, 강원도 정선 출생)
+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 세상 다 사라져도
이 세상 다 준다 하여도
그대 하나만을 사랑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위해
함께 나눌 수 있는 꿈을 위해
내 모든 것 다 버리고
그대 고운 모습
하나만을 사랑합니다
비록 몸은 가난하여도
마음은 부자입니다
비록 내 생활은 초라하여도
내 가슴은 따뜻합니다
그대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그 하나만으로
나는 정녕 그대를 사랑합니다
내 혼신을 다해
그대 하나만을 사랑합니다
(심성보·시인)
+ 나머지 선택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마음을 모아
혼자 집을 짓고 있습니다
쌓인 그리움으로 기초를 다지고
오랜 기다림으로 기둥을 세워
작은 아쉬움들 모아 벽을 채우다
해맑은 미소로 창문을 달고
질긴 인연으로 대들보를 올려서
떠도는 아픔들 모아 서까래를 놓아
부드러운 정으로 지붕을 얹으면
흙 내음 풍기는 초가삼간은 다되어 가는데
그래도 아쉬움 남을까 봐
소박한 꿈들 모아
꽃피는 정원도 만들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 가슴에 걸린 열쇠
나머지 선택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박우복·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1.07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로 부서진다 해도
아깝지 않을 거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부서져서
하얀 포말로
그대의 발치에 머무른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랑
아낌없이 주고 남은 재처럼
거룩한 사랑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완전하고
비로소 한몸이 될 수 있는 것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한 그루 나무로
그대 안에서
고이 숨을 쉴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