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와 섞이고 싶은 살이 있다.
더 깊이 찔리고 싶은 상처가 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싶은 영혼이 있다.
온몸을 찔려도 성이 안 가시는 쾌락이 있다.
서울에선 못이 잘 팔려나간다.
나날이 수요가 급증한다.
(최문자·시인, 1941-)
+ 도시가 미워졌을 때 훌쩍
도시가 미워졌으므로 그저 훌쩍
누구도 못 말리는 이 버릇
학교고 동회고 우체국이고
문방구고 세탁소고 가까운 슈퍼고
도시가 미워졌을 때
신세는 신세고
공연히 사기당한 것 같을 때
그들이 위조지폐를 물쓰듯할 때
뻥뻥 터지는 어음 부도
이럴 때
누가 말려도 떠날래
솔직한 말이지만
수평선에 목맨 심정으로 토하고 싶어
훌쩍 떠날래
(이생진·시인, 1929-)
+ 화전민
난 도시에 불을 놓고 싶다
검게 그을린 돌무더기를 캐내고
고랑을 만들어
옥수수를 심고 싶다
내 키보다 크게 자란 푸른 잎들이
태풍에 흔들리며
언덕 너머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싶다
빌딩들 사이로 날이 저물고
기다란 그림자 끌며 퇴근할 때면
난 주머니 속의 성냥갑을 만지작거린다
(전윤호·시인, 강원도 정선 출생)
+ 수련이 많이 되는 도시
인적 없는 산중 암자에
중이 오래 입어
떨어진 옷을 기워 계속 입으면
칭찬의 소리가 마르지 않지만
사람 눈이 많은 도시에서
떨어진 옷을 기워 입고
남 눈치 의식 않고 당당히 살아가면
옷 바로 못 입는다고
예절이 없다고 한다
(김한기·시인, 1968-)
+ 도시의 숲 속
언제나 길이 아닌
풀숲은 위험하다.
발뒤꿈치를 노리는 독사의
촘촘하고 하얀 이빨들
풀쐐기가 숨어 있는
우거진 풀숲은 위험하다.
독사, 풀쐐기들의 풀숲보다
무서운 도시의 숲 속
행방불명된 처녀의 비명소리가
유성(流星)처럼 사라지는 심야
꽃뱀보다 현란한
도시의 숲 속은 위험하다.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도시인의 눈
나무들도 철수하고
시냇물도 철수하고
새들도 모두 철수한 겨울섬
스승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主人도 없는 廢家.
(김영호·시인, 충북 청원 출생)
+ 도시의 악인들
밤이면
어둠을 밝히려
곳곳에 불을 밝혀 놓지만
두 눈 딱 감고
죄를 짓는다
대낮이면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두 눈 다 뜨고
죄를 짓는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도시
부르는 소리 없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모여라 소리 없어도
모이는 사람이 있다
떠나야 한다
떠나가야 한다
호미 자루, 괭이 자루, 삽 자루
모두 던져 버리고
깊은 정 묻어둔
둥지조차 버리고
어미 아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먼지 득실거리고
소리 득실거리고
인정 바싹 말라붙은 땅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하여 누울 땅 없어
사람 위에 사람 얹어
사람 위에 사람 얹어
마지막 꼭대기 하늘에 누워
아, 그래도 잠은 오는가
도시가 솟구친다
하룻밤 자면 또 솟구친다
동서남북 솟구친다
부글부글 끓는다
터진다
깨진다
찢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박덕중·시인, 1942-)
+ 도시인
도시의 새장 속엔
많은 새들이
메마른 가슴으로
노래를 한다
높은 벽을 쌓아
비밀을 감추고
내일을 위해
기막힌 언어를
실토한다
오늘도 여전히
어제처럼
멋진 내일을 장식하기 위해
터질 듯이 풍선을 불어
두둥실 하늘 높이
날리는 도시인
(홍경애·시인, 1954-)
+ 都市人
비가 오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시에는 마른 새싹이 돋고
까맣게 그을린 꽃이 피는데
우리는 한숨 돌릴 여유도 없이
어디론가 밀리어 가고 있구나
생존을 위한 반목 속에서
지구는 빠르게 병들어 가고
하늘은 조금씩 낮아지는데
우리는 오직 첨단을 향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고 있구나
그리움을 묻어두고 사는 이 시대.
(차재각·시인, 1958-)
+ 도시인
한여름 밤
쑥 연기 모기 쫓고
별 무리 헤어 보던
깜깜한 밤이 그립다
경계 없는 낮과 밤을 오가며
원인 모를 두통
몇 알의 진통제를 넘기고
환상의 세계에서
앞으로만 달리는 도시인
화이트칼라 속
가슴은 검게 타는데
생명 잃은 수돗물
끈끈한 하루를 헹구고
무기력에 익숙하다
(장미숙·시인, 1957-)
+ 도시의 사람들
저마다 꿈차에 시동 건
사람들의 열기
도시는 붉게 타는 온난화지대
그늘 벗는 빌딩숲은
계절도 없이 열대야로 숨막힌다
무엇을 품고 가는지
뼈아픈 하루
실시간에 부려놓고
막히고 끊기는 여유 없다
시간의 그물에 걸려 자꾸만 넘어지고
한 겹씩 얇아지는 마음이지만
눈뜨지 못한 햇살 아래서도
가지 않은 길
버릴 수 없어
그들은 25시를 산다
(우순애·시인)
+ 도시의 아이들
도시에는 공터가 없다.
공터마다 비집고 들어선
자동차들 때문에
아이들의
공놀이, 술래잡기 놀이는
자동차들에게 밀려
집으로 숨어든다.
집에서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할까?
온종일
컴퓨터 오락을 하던
일곱 살배기가
앞니가 빠진 채
웃고 있다.
친구와 대화도 잊어버릴까 몰라.
기계와 놀던 감성이
사람과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쑥쑥 자라난다.
(목필균·시인)
+ 도시의 비둘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못하고
뿌우연 매연과 소음 사이를
그저 운명처럼 살아간다
잃어버린 숲과 하늘
깊은 계곡, 바람 부는 광야
딱딱한 아스팔트길에서
오늘도 두 눈을 바쁘게 두리번거리며
부리가 아프게 모일 쪼아댄다
아,
훌쩍 떠나지 못하고
그저 운명처럼 살아간다.
(김영월·시인, 1948-)
+ 도시에 비둘기가 산다
도시인의 발걸음 사이에
비둘기가 산다
낯설게 찾아오는 선한 눈망울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면
도시 속의 귀여운 장난감이 된다
도시를 덮고 있는 그물 속에서
비둘기가 산다
오종종 걸어가는 발가락들을
회색날개로 감추고 산다.
도시를 휘감은 써늘한 칼날에
예쁜 발가락이
하나씩 잘려도 울음이 없다.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도시에
사람과 비둘기가 산다
서로의 아픔을 모른 척해도
그들끼리는 몸을 부빈다
도시의 모퉁이에
뒤뚱거리는 그들이 산다
(최해춘·시인)
+ 도시의 참새
컨테이너박스의 참새는 늘
아파트 베란다의 제비가 부러웠다
깨끗한 환경과 가벼운 도약으로
드높은 창공을 휘저으며
싱싱한 먹이를 낚아채는
제비들의 날개가 부러웠다
사람들의 발길질을 피하여 땅 위를 종종대며
먹다버린 빵부스러기나 쪼아대는
자신들의 신세가 한없이 처량했다
그렇게 그렇게 참새들은 컨테이너박스 위에 앉아
제비들을 부러워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멋쟁이 제비들 빈집만 남긴 채
모두들 따뜻한 남쪽을 향하여 휴가를 떠나고 없을 때
참새는 더욱 발목이 시리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봄이 오고 있던 어느 날
조금씩 조금씩 컨테이너박스 사이로
미세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던 그 어느 봄날,
아파트 봄단장 페인트칠을 하는 인부들에 의하여
제비의 집들이 무참히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참새는 차마 끔찍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초라하지만 안심하고 새끼를 기를 수 있는
자기들만의 집이 있다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참새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머지 않아 완연한 봄이 되면
제비는 또다시 돌아와 지금보다 더 좋은 새 집을 지을 거란 걸)
때문에 참새는 오늘도 스스로를 위안하며
바쁘게 아침을 짹짹인다
(전병조·시인)
+ 도시의 새
콩새 딱새 때까치가
수십 년 전에는 도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한강변에 쓰러진 흰뺨오리 모이주머니에서
구리 조각 엽총탄환 플라스틱 파편이 발견되기 전에는
딱따구리와 물총새도 살았다고 한다.
여름이면
벌거숭이 아이들이 불러모으는
모래무지와 송사리떼도
은모래빛 중랑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죽은 흰뺨오리의 눈빛.
도시의 공포를 삼킨 그 눈빛.
역광을 받으며
까마귀떼와 외다리 비둘기가
밤섬과 교각을 선회하는데
63빌딩은 거대한 검은 관으로 솟아 있다.
언제쯤일까,
도시의 비둘기가 전설로만 남아 있을
그때는?
(설태수·시인, 1954-)
+ 도시 가로수가 들려 준 말
전선으로 내 몸을 온통
둘둘 휘감았죠
작은 전구들이
번쩍번쩍
사람들은
보기 좋다 아름답다,
감탄하지만
나는
가지 사이로
햇빛 받아
별빛 받아
저절로 빛나고 싶어요
피부가 너무 따가워요
밤마다 몸살 난 것처럼
온몸이 아파요
(오지연·아동문학가)
+ 도시의 얼굴
가로수 길게 그림자 그리는 오후
종일 신문에서 쏟아진 이야기들이
도시의 아스팔트에서 오랜 풍속과도 같은 노을을 지나 밤으로 간다.
어제처럼 매 마찬가지인
광화문에서 미아리까지
거리마다 용광로처럼 네온이 불 밝히는 밤
순환선 전철 안에서
신도시를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을지로를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스치다 부딪치다 만나는 얼굴마다
모두 하나같이 전투와도 같이 치열했던 고단함이다.
압구정에도 영등포에도
취기에 절반 사랑에 절반
숱한 얼굴들 틈새에서
산동네 옥탑방 빨랫줄에 매달려
가난의 끈을 잘라 버리지 못한
누구네 허기진 얼굴은 거리에서 방황을 하고
또 한 얼굴
역전 쪽 방 길 모퉁이에서
고단한 얼굴이
하루마저도 버거운 삶으로 비틀거린다.
이마에 물결처럼 깊어진 주름살
무거웠던 지난 세월을 어루만지며
그 얼굴은 아픔이고 슬픔이다
소리 죽여 흐느끼는 오늘의 얼굴 모두가
새삼 불러야 이유를 알아차리고
내일은 꿈과 희망 가득한 미소 띤 얼굴이길
(조사익·시인)
+ 도시의 외로움
나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
나 없이 오가는 무수한 말들
아파트 베란다 너머
돌아가는 세상은
이미 내가 없는 저 세상이다
껍질로 차단된 서러운 노래다
이 외로움은, 아니지
정작 퇴화된 자의 슬픈 몸부림이지
벌집처럼 박혀
다가갈 수록 차가운 이질감은
마치 빗겨선 영혼의 비웃음 같다
생면부지로 맞대고 사는
견고한 사각공화국
비집고 들어설
한 뼘의 가치도 없다
흙 기운을 잃어버려
직립 이상으로는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할 존재들
외로움은
눈 한번 찔끔 감으면
금새 거기서 독립한다
(강희창·시인, 1961-)
+ 지금 도시는 사막이 되고 있다
우리의 빵이 문득 딱딱한 돌이 되고
그 돌들은 난데없는 바람에
하얗게 부서져 모래가 된다면
그렇게 산이며 건물들이며
모두가 마침내 모래언덕이 된다면
나는 그대와 더불어
그 사막을 건너는 육봉 낙타가 될까
통통 불어 속으로는 한 자루나 물을 담은 채
잎은 날카로운 가시로 위장한 푸른 선인장이 될까
우리의 도시가 한 바람에 까무룩히 지워지고
어쩌면 지평선도 무의미한 사막이 되면
차라리 독한 이빨로
저 빛나는 태양을, 그 심장을 물어뜯는
전갈이 될까
그렇게 어둠을 부를까
(김영천·시인, 1948-)
+ 도시의 불빛
좀더 밤이 오길 기다리자꾸나.
내 방에서처럼 저 집들도
분명 전등을 켜고 있을 터인데
불빛들이 내게 닿기에는
아직 충분히 어둡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샛별은
하늘의 경사를 오르며 맑아진다.
집들의 윤곽이 가라앉고
말갛게 창문이 떠오른다.
밤을 보낼 치장을 마친
집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한 친구가 외쳤었지.
"저 불빛들 좀 봐!
알알이 슬픔이야!"
지금 저 건너편에서 어떤 이도
이쪽을 건너보며 똑같은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
산책 나와 동네 인근 야산 오르면서
잡목들 베인 밑동 사이에 누운 묘목들과
듬성듬성 파인 구덩이들 본다
묘목이 뿌리 내릴 자린가 싶어 들여다보다가
어머니 생전 뱃속으로 여겨져서
조심스레 들어가 태아처럼 쪼그려 앉아 본다
내가 한 톨 씨로 빠르게 자궁에 가 닿았을 적에
몸 떨면서 어머니는 새 숨을 느끼셨을까
나는 가만히 밖으로 나와 묘목 하나 들어서
구덩이에 세워 놓고 흙 끌어다 채운다
이 구덩이도 새 숨을 느끼면서
산을 따스하게 데워 나갈 것이다
잘린 잡목에서 떨어진 잎새들 떠올라 팔랑팔랑
산등성 타고서 신록으로 퍼져간다
갓 태어난 내가 젖가슴에 안겨서 배냇웃음 지을 적에
사람들에게로 번져 가 우하하하 우하하하
큰 웃음 되던 걸 어머니는 보셨을까
나는 야산 내려오면서 구덩이마다 묘목 심어주었다
(하종오·시인,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