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어둠이 밤을 내리찍고 있다
허공에 걸려 있는
칠흑의 도끼
밤은 비명을 치며 깨어지고
빛나는 적막이 눈을 말똥처럼 뜨고 있다
(홍해리·시인, 1942-)
+ 새벽 산책길에서
아스라한 초원 끝
지평선을 뚫고 솟구치는
태양을 보노라면
나도 저처럼
꿈 많은 얼굴로
태어났겠지 싶다
(정소슬·시인, 1957-)
+ 새벽
분주한 마음 잠 재워
내일 고대한 주인
시간 앞에 기쁨으로 마주하는 시간
알알이 차오르는 삶의 희열
더불어 함께 솟아나는 용기
그대를 사랑하는
한없이 고우며 깨끗한 시간
(정윤목·시인, 충북 보은 출생)
+ 꼭두새벽
조용히 창을 열었습니다
개밥바라기 아직 멀쩡합니다
지나던 바람이 쏴아 몰려옵니다
그대의 영혼도 몰려오는 듯 합니다
창 턱 밑에서
산허리를 휘감은 듯
안개가 가물거리며 달려옵니다
그대가 호호 불며 이쪽으로 보낸
사랑의 입김인 듯합니다
(반기룡·시인)
*개밥바라기: 저녁 때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金星)'을 속되게 이르는 말.
+ 새벽잠
눈은 떠 있으면서
종소리도 다 들으면서
일어나기는 싫은 새벽잠
밤새도록 비운 공복이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는 않는 새벽잠
둥근 해가 불끈
엉덩이를 치받치는 새벽잠
가장 짧고
평화로운 잠.
(정대구·시인, 1936-)
+ 새벽
눈 감고 있다 해도
새벽은 열리기 마련이다.
반짝이는 깨우침이 찌르르 떨려오고
가려운 속살 헤치고
빼꼼이 내다보는 얼굴.
입 다물고 있다 해도
새벽은 싱싱할 뿐이다.
잉어처럼 몸이 더운 우리들의 어깨 너머
나직한 비명소리로
바람이 인다.
(강세화·시인, 1951-)
내 우울함이
정녕 어느 누구에게 전해진다 해도
그 쓸쓸함은 남아
누누이 위안의 힘이 되는 것이므로,
나는,
어둠의 길이 환해질 때까지
달빛 기우는
새벽으로 서 있어야 한다.
(박종영·시인)
+ 새벽달
마알간 새벽하늘
홀로 뜬 저 둥근 달
간밤을 뜬눈으로
지구촌을 지켰구나
태양이
붉게 치솟으매
넘겨주고 떠나네
(오정방·시인)
+ 새벽 산
가녀린 긴 허리
잘 발달한 둔부
풍만한 몸매
길게 누워 있다
지난밤
달콤한 정사(情事)
즐기고
곤히 잠든
여인네 같다.
(이문조·시인)
+ 밤은 새벽에 출근한다
이른 새벽
잠 덜 깬 눈을 비비며
수면 아래로 혹은
지하로 바삐 밤이 스며든다
진종일 비지땀을 흘리며
지상과 지하에서
빛과 어둠 사이에서
외롭고 슬픈 것들을 뒤섞다가
가까스로 저녁이 되어서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와
고단한 몸을 누이고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잠이 든다
아무도 모른다
저 밤이 새벽만 되면 슬그머니 나가
저녁에 무사히 쪽방으로 돌아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잠드는지를....
(우영규·시인, 대구 출생)
+ 새벽에
새벽 4시
아침 예배를 위하여
아내는 교회 길에 오르고
나는 아내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제가 지금 어떤 기도를 드려야
아내를 위하는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당신의 섭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팔 년이나 병에 있는
가련한 여인은
혈루병이 물러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하고
문둥이가 깨끗해지는
예수님의 음성을 귀에 그리며
애처로운 기침 소리를
동이 트는 새벽길에
뿌리는 것이다.
아내의 소망은
앞으로 한 십 년
살고 싶은 것뿐이요
더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은
주님의 복음을 들고
거리에 나가고 싶다는 것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차라리 행복인 것을
섭리는 영원한 문 안에 있고
아내와 나는 그 문 밖에 서서
언젠가 열려 올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황금찬·시인, 1918-)
+ 신새벽
공중전화 부스, 새벽 한 시
벚꽃 폭설
술김에 아이들
아이들 이름, 또박또박 부르며
수화기를 집어든다
아들아--
밖에는 봄 밤 폭설
밥 먹었느냐, 밥들은 먹었느냐
수화기 저쪽은 캄캄하다
밖은 환한 봄밤
목련나무는 제 꽃잎들 흐릿한 투신을
물끄러미,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그러고보니 집 전화번호를 누르지 않았구나
새벽 두 시, 부스 안은 지린내
딸아--
돈 벌어, 곧 가마
기우뚱, 지구가 한 바퀴 돈다
(이문재·시인, 1959-)
+ 새벽 인력시장
쩍쩍 갈라진 동토(冬土)
한 움큼의 어둠은 발끝에 머물고
푸른 생각은
먼 길 돌아가는 강이 되는데
그래! 그런 거야!
버팅기고 사는 거야!
살을 에는 바람
주린 배는
모닥불에 녹아들다.
(오경택·교사 시인)
+ 새벽길 소년
딴 아이들은
따뜻한 잠자리에 있을 시간,
소년은 샛별을 보며,
신문을 돌린다.
별빛 아래
청소부 아저씨의
개나리 옷이 보인다.
소년의 뺨 위에
찬바람이 파고든다.
엄마 아빠 다 여의고,
신문 배달 소년이 되어
할머니를 모시는 장한 소년 가장
소년의 볼을 깎는 찬바람은,
한파(寒波)가 아니라, 세파(世波)였다.
(김시종·시인)
+ 새벽 세시쯤
인천직할시 부평구 부평1동 대림아파트
1104호 우리 집 앞집에 사는
1103호 여인은 늘 부끄러워한다
내가 부평 바닥 외진 골목 술집에서
술 마시고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세시쯤
여인도 비척비척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이 부평 바닥 외진 골목에서
휘청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듯
여인도 비척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 거라고
그저 그렇게,
여인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새벽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3학년 아들 하나와
살아가고 있는 여인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술장사를 하고 있단다
술을 마시고
휘청거리는 나에게
술장사를 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여인
가끔,
나는 새벽 세시쯤
여인의 1103호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내 귀를 기울이곤 한다
(정세훈·시인, 1955-)
+ 새벽깃발
길은 멀고 험해도
가야 할 나라가 있습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벽빛 넘치는 나라
우리들 밥과 사랑과 희망도
온몸으로 하나되어 가야만 합니다
우리 비록 가진 것 없다 해도
우리 모두 꿈꾸는 노동의 환한 얼굴로
지친 마음에 마음을 걸고 노래 부르며
어둠을 가르는 새벽깃발이 되어
가야만 합니다.
(홍관희·시인, 1959-)
+ 새벽
새벽에 몰래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철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 밤새도록 해뜨는 쪽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하늘이 먼저
새벽이 오는 것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기상소리가 울리기 전에 몰래 눈을 뜨면
새들이 더 일찍 깨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체온으로 자고 깨면
하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눈비를 맞던 새들이
새벽이 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간수 몰래 깨어서 새벽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새벽이 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별빛같이 눈을 켜고
한 시대의 가장 어두운 것들과 싸워온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도종환·시인, 1954-)
+ 새벽밥
동트기 전에
죽은 듯이 누웠다가 문득
벌떡 일어나 먹는 밥
지난밤보다 더 큰 밤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
밥을 먹는다
새벽밥이여
혼자 먹는 밥
숨죽이며 먹는 밥
분명히 떠나 갈 사람이 먹는 밥이여
몸서리치며 먹는 밥이여
남몰래 신새벽에
그대 왜 홀연히 깨어 앉아
식구 없는 밥상을 앞에 하는가
따스함이랑 그리움이랑 기꺼이 눌러 죽이고
맨손으로 가자
돌아올 길을 생각하지 말자
끝내 닿아야 할 나라로 가는
아직은 춥고 어두운 길을 보는가
눈물도 없이 먹는다
새벽밥이여
조선 천지 이 집 저 집
벌떡 벌떡 일어나서
한 등씩 불 밝히고 밥 먹는 사람이여
그대 가르고 갈 바람 속에 놓인
시퍼런 한 그릇 밥
새벽밥이여
(안도현·시인,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