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에 관한 시 모음> 정숙자의 '귀뚜라미에게' 외 + 귀뚜라미에게 울도록 숙명지워졌을지라도 귀뚜라미야 너처럼만 고웁게 울 수 있 다 면 . (정숙자·시인) + 귀뚜라미 귀뚤귀뚤, 귀 뚫어 아래 세상 얼마나 귀 막혔니 귀뚤귀뚤, 귀 뚫어 (권경업·시인, 1952-) + 귀뚜라미 귀뚜라미야, 한밤내 생떼 생떼 쓰지 마라 일주일만 기다리면 수업료 준대도 그러느냐 (안도현·시인, 1961-) + 귀뚜라미 하늘에 하나 가득 별 박힌 가을 밤 땅 위는 온통 귀뚜라미 소리로 차 있다 하늘과 땅은 어둠을 사이 한 가까운 이웃인데 귀뚜라미 소리로 별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김동리·소설가, 1913-1995) *<문학사상> 1998년 7월호에 공개된 미발표 유작시 + 귀뚜라미 - 몸이야기 7 어젯밤 내 침실에 귀한 연주자 한 분 오셨습니다. G선상에 가을을 올려놓고 온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귓볼 가까이 그의 노래가 살아났습니다. 침실 가득 바람이 일고 애드립의 클라이맥스가 퍼졌습니다. 나의 몸 가득 그대가 물결졌습니다. (권천학·시인, 일본 출생, 전북 김제에서 성장) + 귀뚜라미 立冬도 지난 어느 날 밤 한잠에서 깨어나니 창 밖 뜰 어디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는 운다[鳴]기보다 목숨을 깎고 저미는 소리랄까? 쇠잔한 목숨의 신음소리랄까! 문득 그 소리가 내 가슴속에서도 울려온다. 내 가슴속 어느 구석에도 귀뚜라미가 숨어사나 보다. 머지않을 나의 죽음이 떠오른다. 이즈막 나의 시가 떠오른다. (구상·시인, 1919-2004) +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나희덕·시인, 1966-) + 귀뚜라미 길 잃은 귀뚜라미 한 마리 싱크대 아래에서 귀뚜르 귀뚜르 가을이다 가을이 왔다 외치고 있네 다행히 가을은 길을 잃지 않았나 봅니다. (이문조·시인) + 귀뚜라미 귀 뚫어라 귀 뚫어라 아날로그 게송偈頌 도시 한 켠 어둑한 곳에서 곱게 잠들라 곱게 잠들라 오프라인 향가鄕歌 저 황혼이 스러질 무렵에 귀뚤귀뚤 뚜르르 촉수에 흐르느니 설운 강물 베갯잇 적시는 먼 귀향 꿈 (한기홍·시인) + 귀뚜라미 귀 뜰 귀 뜰 귀뚜라미 나 어릴 적 술 지게미 먹고 배고파 잠 못들 때 울어대던 귀람이 귀 뜰 귀 뜰 귀뚜라미 억울한 일 당하여 혼자 술 마실 때 귓속에 울던 귓돌이 귀 뜰 귀 뜰 귀뚜라미 부모님 산소에 꿇어앉은 나에게 나무라던 귓돌암 귀 뜰 귀 뜰 귀뚜라미 밤새 배게 속에 울더니 아침에 깨어나니 책상 밑에 귀돌이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귀뚜라미를 조심하셔요 귀뚜라미를 조심하셔요 가을이면 저에겐 귀뚜라미가 가장 두렵습니다 흔들지 않아도 약해지는 마음인데 아아, 귀뚜라미는 인정 없이 흔들거든요 귀뚜라미에게 지는 날이면 잠도 베개를 떠나고 꿈꿀 수도 없게 됩니다 닦아도 묻어나지 않는 피가 속으로 속으로 얼마나 흐르는지 가을이면 부디 귀뚜라미를 조심하셔요 제 마음처럼 당신에게도 아직 그리움이 남았걸랑은. (정숙자·시인) + 귀뚜라미 저 놈은 무슨 심사로 어쩌자고 밤새도록 날새도록 목을 놓아 남의 잠을 끌어다 별로 띄울까 단풍잎 지는 소리 이슬 듣는 소리에 천지가 더욱 넓구나 한잔 술 앞에 하고 혼자 취하니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저 울음소리....... 목에 밟히고 가슴에 쌓이는 별 지는 소리. (홍해리·시인, 1942-) + 귀뚜라미의 휴대전화 - 귀뚜라미 모든 생물은 생식生殖을 위해서 산다 그렇게 간단한 생활관이 복잡해졌다 귀뚜라미가 운다 우는 것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다 조심해서 오라는 휴대용 통신이다 그들은 날 때부터 통신기를 가지고 나왔다 눈치껏 오라는 신호 시인이 밤늦게까지 시 쓰고 있으니 소리내지 말고 오라는 신호다 (이생진·시인, 1929-) + 귀뚜라미 울음을 빌어 1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더니 귀뚜라미도 자리를 가려서 우는 것일까. 헤어져 돌아오는 밤 닫힌 문들만 바람 속에 서 있고, 산번지(山番地)가 시작되는 곳에서 귀뚜라미는 울기 시작한다. 아랫동네의 너른 뜰에 울 자리 하나 없어 이 언덕배기까지 와 울 자리를 정하는 것일까. 나는 숨을 죽이며 예까지 왔지만, 울어야 할 울음을 울지 못하는 그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귀뚜라미야, 낮게 깔려 뒤척이는 달빛더미 속 어디쯤 누구의 목청으로 끝없는 슬픔을 일깨워주는가. (이명수·시인, 1945-) + 귀뚜라미 너희를 일러 가을의 전령사라 했더냐 귀뚜르 귀뚜르 귀뚜르르 귀뚫어라 귀뚫어라 귀를 뚫어라 해넘이 저녁녘부터 해돋이 새벽녘까지 어지간히도 울어대는구나 그토록 목이 쉬도록 고스란히 밤을 새워 울부짖음은 가을이 오고 있다는 소리냐 가을은 이미 와 있다는 소리냐 아니면 이제사 입을 모아 제발 서둘러 와 달라고 보채는 소리냐 모레면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 길가에 심어진 코스모스들 서둘러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정녕 가을이 곁에 와 있음을 알겠구나 오냐 귀를 열어 듣고 있느니라 너희가 전하고자 하는 이런저런 소식을. (혜천 김기상·시인) + 귀뚜라미 귀뚤귀뚤 귀뚜라미 뜰 앞에 모여 앉아 합창을 한다 여름 가고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가을 노래를 부른다 엄마 잃은 아기 귀뚜라미 엄마 찾느라고 목놓아 우는 소리 구슬프구나 어제 밤은 담장 밑에 모두 모여 노래자랑 하더니 오늘밤은 뜰 앞 잔디밭에 둘러앉아 연주회가 열렸다 귀뚜라미 친구들 헤어지는 아쉬움에 달빛 비추는 토방(土房) 아래서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노래한다 (신순균·목사 시인, 1940-) + 귀뚜라미 장맛비 사이로 여름은 가고 풀잎 그늘에선 어느새 귀뚜라미 운다 달빛으로 실을 뽑아 옷을 지은들 네 고운 노래에 보답이 될까 우리들 일상에 목메이는 일 하소연도 애절한 노래가 되나 노래가 쌓이면 무엇이 되어 어둔 밤에 멀리 멀리 비치어 가나 세월이 한참씩 떠나기도 하고 졸지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하는 우리들 일상에서 수습하기 곤란한 어려움도 이 밤에는 잊고 지내자 어두운 마음 어두운 생각 거듭 거듭 씻어주며 귀뚜라미 운다 (강세화·시인, 1951-) + 시인과 귀뚜라미 귀뚜라미와 시인이 어느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가을밤 귀뚜라미와 시인은 서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달이 밝거나 뜰에 꽃잎 몇 개 떨어지는 분위기면 서로가 좋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귀뚜라미는 손질한 악기를 등에 메고 시인의 오두막을 방문했습니다 달이 밝았으며 뜰 가엔 꽃잎도 지는 밤 그러나 가슴앓이 시인은 없었습니다 밤을 새워 기다려도 꽃잎만 질 뿐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귀뚜라미는 전화벨만 울리며 떠돌았습니다 (정일남·광부 시인, 강원도 삼척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