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에 관한 시 모음> 윤수천의 '항아리' 외 + 항아리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항아리 속에서는 구름이 떠간다. 꽃구름 뭉게구름 소나기구름. 아무도 없는 데도 항아리 속에서는 무슨 소리가 난다. 꽃잎 눈뜨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때론 수수밭을 서성이는 그 달빛 소리. 누가 맨 처음 항아리 빚는 것을 알았을까. 별이 우쭐대는 밤이면 나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빨간 불더미에서 흙을 주무르시던 그 불빛 손. 할아버지 생각에 이어 떠오르는 달 달의 꿈이 잠긴 아, 항아리. 누가 항아리 속에 그 많은 말을 담아 놓았을까. 꿈속에서도 항아리의 낱말은 파란 별이 되어 빛난다. (윤수천·시인, 1942-) + 항아리 아기 참새는 어딜 갔을까? 조그만 항아리에 물을 길어 두고. 아침에 돋아난 이슬방울이 깨어진 새알 껍질에 모였네. (박목월·시인, 1916-1978) + 항아리 마지막으로 배추김치 꺼내고 뚜껑을 덮자 테 두른 항아리 (주근옥·시인) + 항아리 한때 채우려 했음을 부끄러워하라 독송을 끝으로 예불을 마쳤다 (구재기·시인, 1950-) + 백자 항아리 여인이여 당신의 공간으로 휘어드는 하늘깃은 해도 달도 별도 꽃도 아닌 흙이 玉옥이 되는 모순이고 기적인가 오오 절묘한 변신은 사랑인가 종교인가. (유안진·시인, 1941-) + 항아리 텅 비어 있다. 손끝에 닿으면 차가운 어둠, 치밀한 수염이 돋는다. 두드리면 메아리 쳐 우는 울음, 황량한 오장육부의 아스라한 깊이 속에서 외롭게 자아올리는 소리 아가리에 맴도는 서러움의 영혼이 투명하게 서린다 (문효치·시인, 1943-) + 항아리를 닦으며 ·1 베란다 한 구석 금 간 항아리 낮 동안 가득하던 햇빛도 새어 지금은 텅 빈 어스름 저녁 외진 빈터 숨어 있는 어둠이야 항아리 속 마른행주 몇 장으로 닦아낼 수 있지만 저것을 어쩌랴 부안임씨 할머님네 굵은 힘줄로 얼기설기 동여 맨 슬픈 세월을. (임명자·시인, 경기도 김포 출생) + 빈 항아리 빈 항아리 두둘겨 보아라 울림이 크다. 그 아픈 울림 소리 속마음 들여다보지 않고 누가 알랴. 무심한 日月은 비껴만 가고 情없는 구름은 흩어만 지고 그림자도 살지 않는 빈 항아리 바람만 감돌다 도망가는구나 (박덕중·시인, 1942-) + 항아리의 소리 쓰지 않고 가만 두어도 방전되어 소모되는 밧데리처럼 내가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의 시를 쓰지 않아도 나는 마침내 고갈되고 말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아구리를 벌리고 앉아서 누구는 향기 없는 꽃이라도 한 다발 꺾어서 꼽아두자 하고 누구는 물이라도 가득 채워두자 하나 나는 텅 빈 채 차마 다 하지 못한 말 몇 마디를 애써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웬만한 바람에도 웅웅웅웅, 깊은 속울음처럼 마침내 내가 나를 울려 나오면 시방 당신은 귀를 기울이십시오 참 진득하게 들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김영천·시인, 1948-) + 비운 항아리처럼 기적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퍼낸 물만큼 물은 다시 고이고 달려온 그만큼 앞길이 트여 멀고 먼 지축의 끝간데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동이 튼다면 날마다 다시 사는 연습입니다 연습하여도 연습하여도 새로 밀리는 어둠이 있어 나는 여전히 낯선 가두에 길을 묻는 미아처럼 서 있곤 했습니다 눈을 감고 살기를 복습하여서 꿈을 위해 비워둔 항아리처럼 꿈도 비워 깊어진 항아리처럼 기적보다 눈부시게 돌아오기를 옷깃 여며여며 기다리겠습니다. (이향아·시인, 1938-) + 항아리 댓잎 스치는 소리에 가슴 베인 그대 보름달 뜨면 홀로 운다 개 짖는 소리, 정만 가득 담고 마을 앞 냇물 건너가는 그대 우리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 아내가 중고품 시장에서 사온 금간 토기 항아리 달 뜨는 밤에는 우우 운다 우리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댓잎 스치는 소리 가슴 베어 사는 그대 (홍석하·시인, 1936-) + 항아리여 그대 비움으로써 가득 참에 이르는 항아리여 언제 바라보아도 당당한 모습 가득 차서 탐냄이 없고 비어있다 하더라도 슬픔이 고이지 않는 항아리여 고즈넉한 이 가을 어머님 부드러운 손길에 알른알른 윤이 오르고... 다만 그것이 표창인양 놓인 자리 그 자리 지켜가는 항아리여 맑은 하늘이 이마에 비껴 내리고 술이 한창 향기롭게 익는 날 키가 커 수줍은 코스모스 마냥 그대 곁에 조용히 피어나고 싶어라 항아리여 비움으로써 가득 참에 이르는 그대 항아리여 (석화石華·시인, 1958년 중국 용정 출생) + 항아리 깊은 산 속 나무 곁에서 겸손으로 다져진 흙을 파다가 가슴속에 항아리 하나 빚어 놓고 사랑을 피우고자 장미꽃 수를 놓으려니 검은 오만이 손끝을 흔들어 고운 꽃잎을 다 털어 버렸다. 떨어진 사랑 꽃잎 향기를 주워 항아리 가득 채워 그윽이 풍기려니 못난 자아가 발길질하여 공든 항아리마저 깨어 버렸다. (김윤자·시인, 1953-) + 항아리 어머니의 은밀한 영토 금남禁男의 영토에는 바람도 숨을 죽이고 햇살도 까치발 들고 지나갔지 해질녘 부서진 햇살이 금분처럼 쏟아지던 날 인고의 세월을 간직한 어머니는 맨드라미, 채송화의 꽃잎 위에 앉아있었지 미루나무 잎 사이 하늘을 바라보며 정한수 한 사발에 복을 빌고 눈시울 적시며 토해낸 비밀 소금 절인 한숨 마를 날 없었던 작은 가슴은 검게 물들어있었지 노란 개나리 지천인 봄날 가슴을 열어 하늘을 담으면 흐르던 구름이 비밀을 엿듣다가 눈물 한 사발 쏟아놓고 가버리면 투박한 몸뚱이 두드리는 빗소리 모아 오롯하게 곰 삭이던 행복 어머니의 성소는 사라지고 항아리 안에서 곰삭던 고추장 된장은 냉장고 안에서 동상에 걸려 떨고 있다 (한종남·시인) + 달 항아리 십오야 둥근 달은 어디서 보아도 둥근 달인데 둥글게 둥글게 채운다고 채운 내 사랑은 님 앞에만 서면 살갑게도 기우뚱 왼쪽이 돌아앉아 돌려놓으니 오른쪽이 처집니다 아무래도 나는 덜 찬 항아리 반듯한 보름달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찌부둥 기울었지만 내 성질 내 색깔로 사는 달 항아리나 되지요. (안수동·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 오지항아리 비유하자면 그대는 청자 백자 항아리는 아니고 삼천포 장터 한쪽에서 박재삼이 만난 큼직한 오지항아리라 할까. 비록 깨지기 쉽고 값쌀지라도 된장 고추장을 담으면 된장 고추장 항아리가 되고 금은보화를 담으면 보물항아리가 되는. 세상이 모르는 보화를 지녔어도 된장 고추장을 담은 듯 티내지 않는 그 모습, 청자 백자처럼 도둑맞을 염려 없이 맵고 짠 고뇌를 담고 있을지라도 눈비를 가리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있는. 비유하자면 그대는 세상이 눈독들일 청자 백자는 아니고 삼천포 바다처럼 반짝이는 어머니의 장독대 가운데 앉아 있는 한 삼백 년 전에 구워낸 듯한 큼직한 오지항아리라 할까.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항아리 눈 장독대 항아리에도 눈이 있는 줄 모르시지요 에잇, 진흙으로 만든 옹이에 무슨 눈이 있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사납게 비바람 불어닥치고 눈보라 마구 쳐들어오는 그 모진 세월에 간신히 목숨 부지하다가 살 나눌 사람 하나 만나서 어찌 어찌 집 하나 짓고 마당 한 편의 볕 잘 드는 뜰에 편편한 돌을 모아놓고 한 단 높여 고르게 쌓은 다음에 독을 얹어놓는데 된장이며 간장이며 고추장을 처음으로 담아놓은 옹기 그것을 항아리 눈이라고 하지요 그 눈이라는 것이 그 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음 같은 것 아니겠어요 벌써 여럿 자식을 뱃속에서 내보내 또 다른 일가를 이루게 한 늙은 어머니같이 오랜 날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불거지고 갈라진 당신을 닮아서 우리집에서 젤로 오래된 어머니의 눈 같은 것이지요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저, 항아리 목 깊은 백색 큰항아리 꽃도 물도 담아 보지 못한 서재 한구석에 무거운 몸, 들여다보지 않았어도 품고 있는 것은 묵은 어둠뿐일 터 이제 어둠도 굳어서 나무등걸처럼 되어 있으려나 저 항아리, 때때로 목숨을 던져서라도 속어둠을 확 깨버리고 싶은 적이 있을까 속울음 터트리고 싶은 적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물이 넘치면 흘러서 샛길을 내듯 항아리 속 어둠도 길을 트는가 밤마다 어둠을 타고 흘러나와 책장을 슬슬 넘겨보다가 그것도 덤덤해지면 창가에서 울어대는 밤새의 날개에 업혀 물비린내 자옥한 강가를 몇 번이고 돌아보고 마을 어귀의 묘지, 오래된 어둠도 만나보는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불빛 사그라지는 어떤 창가, 고뇌에 찬 이마에 살포시 손을 내렸다가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속 캄캄 어둠 품고 있는 저 무거운 몸이 청청 푸른 이마로 깊은 사유의 시간을 뿌리 내리고 있는지. (유봉희·시인) + 향기로운 항아리를 하나 빚고 싶다 뚝배기 같은 사람들이 흔한 시대,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뜻이 잘 통하는 한 친구를 만나면 참으로 아름다운 항아리를 하나 빚고 싶다. 혼자로는 만들 수 없고, 둘이 노력해야 아늑한 문양과 향기로운 공간을 세울 수 있는 항아리. 그 보이지 않는 항아리를 빚는 데에 처음부터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질 리 만무하겠지만 나를 먼저 죽이고, 모난 모서리를 허물면 부드러운 손이 내게서 그에게로 가고, 그에게서도 내게로 오리라. 그 손에는 서로의 아픔과 슬픔이 쥐어져 있어서 문양의 색상과 내용도 다양하게 구성하리라. 그러나, 완성을 위해선 결코 서두르진 않으리라. 어쩌면 그와 나는 이 세상에선 영원히 빚지 못할지 모른다. 어느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 완성을 이룰지 모른다. 심성이 정말로 진흙처럼 고운 한 친구를 만나면 나는 청자 같은 항아리를 하나 빚고 싶다. 문양이 아름다운 항아리, 향기가 영원히 남는 항아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국보급 항아리. (김영남·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