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마음에 관한 시 모음> 낭궁벽의 '별의 아픔' 외 + 별의 아픔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어린 아이가 뒹굴을 때에 감응적으로 깜짝 놀라신 일이 없으십니까. 임이시요,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지상의 꽃을 비틀어 꺾을 때에 천상의 별이 아파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남궁벽·시인, 1894-1922) + 아, 이걸 어째? 화분에 물을 주다가 구석에 삐쭉 솟아 있는 잡초를 뽑았습니다. 안 뽑히는 것을 억지로 비틀어 뽑았습니다. 순간, 아야야 - 하는 잡초의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아, 이걸 어째? 내 손에 피가 묻었습니다. 아, 이걸 어째? (강은교·시인, 1945-) + 자비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복효근·시인, 1962-) + 부드러운 힘 우리 어머니 잠시 외출을 하시면 푸성귀니 홍합이니 도라지니 당장은 필요치 않은 것들을 굽은 허리에, 까만 봉지 바리바리 들고 오시네 푸성귀는 노점상 할머니가 너무 야위어 보여서 홍합은 까는 손이 발갛게 시려 보여서 도라지는 행상 아주머니의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천 원 이천 원 푼돈으로 꼬깃꼬깃 어머니의 염려도 거기 놓고 오시네 오셔서는 안쓰러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어머니의 여린 한숨으로 엄동의 한 끝에 봄 녹는 소리 간질간질 들리는 듯도 하였네 (홍수희·시인) + 계단 이야기 꼬부랑 할머니가 한 발 한 발 힘겹게 올라서시면 내 몸은 겹겹이 층이 져서 안타까웠어 첫나들이 아가 아장아장 내 등에 꽃신 디딜 때 온몸 간지러워 웃음 지었지 "아이야, 세상은 이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거란다." 누군가 나를 두고 말할 때 나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될 수 있다니 하루 종일 등 밟힌 고달픔도 잊었지 하지만 딱 한 번 잊고 싶은 날이 있었어 그날은 할 수만 있다면 내 온몸을 헐어 버리고 싶었어 아저씨의 담뱃불에 등이 데여서도 아니고 철없는 누나가 뱉은 껌이 내 엉덩이에 달라붙어서도 아니야 휠체어에 탄 소년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 눈망울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슬픈 눈빛 때문이었어 (고광근·아동문학가, 1963-) + 혼자서 크는 아이 상식이는 아버지와 산다 한 달에 한두 번 빈집에 들어오는 아버지는 상식이 없을 때 더 많이 집을 다녀간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얼굴을 보기 어렵다 한다 방학 아닐 때는 학교에서 점심도 먹고 돌봄 교실에서 저녁도 먹지만 방학이 되면 굶을 때가 많다 그런다 그래도 늘 웃는 낯이다 중국집하는 우리 아버지가 상식이 이야기를 듣고 반찬을 만들어 갖다주고 방학 동안 우리 식당에 와서 밥을 먹게 하지만 상식이는 말도 없이 안 올 때가 더 많다 미안해서 그렇다고 했다 상식이 우리 식당에 안 오는 날 상식이 집에 가 보면 불도 안 땐 차가운 방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밥 먹었니 물으면 응 그러고 내가 춥다 그러면 자기는 웃을 많이 입어 안 춥다 그런다 아버지가 계셔도 혼자서 커야 하는 상식이 상식이만 보면 내 눈에 눈물이 나올라 한다 상식이 앞에서 잘난 척하고 우쭐거리는 나를 최고 친한 친구라고 말하는 상식이 상식이는 하는 게 꼭 형 같다 (오승강·아동문학가, 1953-) + 내가 바라는 세상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욱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요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 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 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입니다 (이기철·시인, 1943-) + 정(情)·7 -옛날에는 그랬다더군 논 가운데 외다리로 서있는 백로 한 마리 보았느냐? 여린 벼 밟지 않으려는 백로의 정(情) 백로가 더욱 눈부시다 백로를 부축하고 있는 바람의 정(情)이 5월의 침묵으로 서있다 한낮의 평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십합혜*를 신고 가다가도 산길에서는 오합혜**로 갈아 신었다고 하더군 산에 있는 벌레들이 밟혀 죽을까 봐 죽령에서도 그랬고 이화령에서도 그랬다는군 옛날에는 그랬다더군 (조두희·시인, 경기도 가평 출생) * 십합혜 : 촘촘하게 삼은 짚신 ** 오합혜 : 느슨하게 삼은 짚신 + 두레반 첫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배고픈 까치들이 감나무 가지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먹는다 이 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 햇좁쌀 같은 햇살이 오종종히 비치는 조붓한 우리 집 아침 두레반 (오탁번·시인, 1943-)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