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에 관한 시 모음> 안도현의 '聖 아기' 외 + 聖 아기 제 앞뒤고 가릴 줄 모르는 어린것, 제가 싼 똥을 손으로 주무르고 볼에 처바르고 입에도 우겨넣는다 앞뒤 가리기에 여념이 없는 더러운 어른들이 보지 않을 때, 마침내 저지른다 저지르는 것이 두려워 떨고 있는 어른들이 보지 않을 때, (안도현·시인, 1961-) + 아가는 지금 아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 무엇을 듣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저 히라동굴에서 마호메트가 알라의 계시를 전해받듯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 저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나자렛 예수 머리 위에서 울리던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 저 가야산 숲속 보리수 아래 석가모니가 정각에 든 순간의 그런 생각에 취해 있다. 아니 아가는 그도 저도 아닌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인류의 오직 하나만의 존재로서 자기만이 싹을 틔우고 꽃 피워야 할 그 누구도 보도 듣도 생각도 못한 그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다. (구상·시인, 1919-2004) +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은 낳아서 백일쯤 되는 어린 애기가 저의 할머니보고 빙그레 웃다가 반가워라 옹알옹알 아직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뭐라고 열심히 옹알대고 있는 것. 그리고는 하늘의 바람이 오고 가시며 창가의 나뭇잎을 건드려 알은체하게 하고 있는 것. (서정주·시인, 1915-2000) + 아기와 더불어 꽃은 어디서 나는지 모르고 핀다 아기도 어디서 나는지 모르고 웃는다 아기는 울지만 우는 것도 피는 것이다 걸음마를 타면 장난감과 논다 의식이 생기고 의지가 선다 아빠 엄마도 거역한다 말을 타다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세 바퀴 차에 앉았다가 택시를 몰다가 인형을 안고 과자를 먹다가 트럭에 걷어 싣고 나팔을 불고 한참 잊었던 엄마 아빠 곁에 간다 자유다! 버린 듯이 부려 놓는다 하나씩 놓아주고는 무너뜨리고 흩어 버린다 어른들이 배워 준 질서가 허물어진다 장난감들이 해방된다 TV에서 다이빙하면 소파 아래 물이라 만들어 놓고 두 팔을 앞으로 풍덩 뛰려는 순간 어마나 현아 현아 안돼 안돼 이불 위에 보자기를 씌워 봉우리를 만들어 주면 올라가 미끄럼 탄다 용이 폭포 속에 들어가면 용이 되어 같이 들어갔다가 같이 나온다 어른은 잘 해준다는 뜻에서 그 천성과 자연에 간섭한다 아기는 혼자 있지 못한다 아기의 고독은 우는 것이다 아기는 가만있지 못하는 임금이다 아기가 보는 것은 장난감이 가득 찬 세상이다 아장아장 걸어서 임금은 가신다 산 위에 뜬 달도 달란다 고무풍선을 주면 달이 된다 모든 것은 장난감 살아서 숨쉰다 아기는 어른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상을 찌푸리면 엄마 아빠 할아버지 주책바가지들! 아기는 어른 속에도 있다 그대로 가만 보는 것이 사랑이요 자애(自愛)다 어른은 천사의 상태에서만 아기의 천진(天眞)에 통한다 그때 아기에게 손을 잡혀 밖에 나가면 아기와 같이 하늘로 간다 길이 험한 데 가면 할아버지! 한다 할아버지는 어진 교통순경이 된다 사람과 사람 어느 사이보다도 아기와 할아버지는 제일 가깝다 아기는 어른의 질서보다도 장난감의 무질서 속에 산다 할아버지는 그 여백(餘白) 속에 있다 (김광섭·시인, 1905-1977) +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잠든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창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별들도 젖어서 눈송이로 내리고 아기의 손등 위로 내 입술을 포개어 나는 깎여져 나간 아기의 눈송이 같이 아름다운 손톱이 된다 아가야 창밖에 함박눈이 내리는 날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흘러간 일에는 마음을 묶지 말고 불행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했다 날마다 내 작은 불행으로 남을 괴롭히지는 않아야 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고요한 용기로써 사랑하지 못하는 오늘밤에는 아가야 숨은 저녁해의 긴 그림자를 이끌고 예수가 눈 내리는 미아리고개를 넘어간다 아가야 내 모든 사랑의 마지막 앞에서 너의 자유로운 삶의 손톱을 깎으며 가난한 아버지의 추억을 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된 것을 가장 먼저 슬퍼해 보지만 나는 지금 너의 맑은 손톱을 사랑으로 깎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정호승·시인, 1950-) +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 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저렇게 달게 자고 나니, 하룻밤에 이 세상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눈알들은 아침을 보고 잠시 휘둥그레지고 어리둥절해진다. 전생이 기억날 듯 말 듯 모든 것이 아주 낯선 모양이다. 그러다가 아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금방 친해져서 온몸으로 그 즐거움을 참지 못한다. (김기택·시인, 1957-) + 아기를 보면서 제비꽃을 만지작거리는 아기의 손가락 봄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는 고사리 같고 장다리밭에서 나비를 쫓는 아기의 눈동자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초저녁의 샛별 같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기지개를 켜는 품은 비 온 뒤 쑤욱쑤욱 자라나는 죽순 같네 오 여보게 친구 우리 아기 좀 보게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호미를 쥐어줘야겠네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괭이를 쥐어줘야겠네 봄이면 들에 나가 나물이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가을이면 산에 올라 칡뿌리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콩나물 한 그릇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서울이 무서워서 그러네 별 하나 아름답게 키우지 못한 서울 하늘이 저주스러워서 그러네 고기 한 마리 병들지 않고 살지 못하는 서울의 강이 싫어서 그러네 우리 아기 고운 아기 나물이나 뜯어먹고 칡뿌리나 캐먹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지언정 맑은 물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가까이 벗하며 흙과 더불어 시골에서 살았으면 싶어서 그러네 (김남주·시인, 1945-1994) +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오바로꾸 미스 김이 그만둔단다 어찌 생각하면 좀 챙피하기도 해서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오바로꾸 미스 김이 이번 달만 하고 그만둔단다 미스 김이 그만둔다니 심란해하는 총각들 중에 말은 안 해도 신바람이 난 건 칙--- 칙--- 휘파람 불어대며 프레스 밟는 스물 일곱 박 기사다 둘이 눈맞은 건 지난 봄 임투 박 기사 깨진 마빡을 미스 김이 머리띠 끌러 싸매준 거다 죽고 못사는 미스 김 박 기사가 차마 한 살림 차릴 형편은 못 되어서 한 삼 년만 기다리자고 약속은 했는데 덜컥 아기가 생기고 말아 식은 나중에 올리기로 하고 그냥 살기로 했단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즤 엄마 아빠를 하나로 엮어준 거다. (조기조·노동자 시인, 1963-) + 단군의 아기 달빛이 차가운 태평양 상공 엔진소리만 요란한 미국행 비행기에서 양부모를 찾아가는 단군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마지막 모국어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으로 나의 가슴은 찢어지는데 무표정한 이방의 승객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안절부절못하는 파란 눈의 아가씨야 아기를 달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울게 내버려 두라 네가 물려주는 미국산 우유로는 한 방울의 눈물도 씻어낼 수 없느니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 어느 미혼모와 비정한 사나이를 향하여 차라리 저주의 기도를 올려라 그리고 함께 울어라 한반도의 아픔이 흩어지는 태평양 상공 날짜 변경선을 지날 무렵 우리의 사랑스런 단군의 아기가 울다 지친 얼굴로 잠이 든다 그것은 체념의 시작 파란 눈의 아가씨는 비로소 안도의 숨결을 몰아쉬며 시계바늘을 돌리고 승객들은 다시 눈을 감는데 나의 가슴은 갈갈이 찢겨진 채 밤바다를 향해 곤두박질한다 아무런 죄도 없이 이름을 잊어버린 아이야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느냐 조국이 멀리 사라져 가는 태평양 상공에서 너를 버린 엄마를 생각하며 배냇짓하는 아기야. (박건호·시인, 1949-) + 엄마 없는 아기와 엄마 없는 아기와 아기 없는 엄마를 한 집에 정답게 살게 해줘요. (크리스티나 로세티·영국의 여류 시인, 1830-18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