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마음의 창
네가 없다면 나는 청맹과니
컴퓨터가 무슨 소용이랴
매일 월담하는 싱싱한 언어들마저
너 없이는 그림의 떡이라서
공연히 씀벅거릴 뿐
물안개 헤살 벗어날 수가 없다
남은 생 다정하게
어딜 가나 함께 하리니
행여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잠자리에 들 땐 반드시 네 방에서
다리 포개고 격식 갖춰 누워야 한다
한뎃잠은 매우 위험하니까,
(권오범·시인)
* 헤살: 짓궂게 방해함,
+ 안경
어째 나도 좀
의젓해 보이지 않습니까.
(나태주·시인, 1945-)
+ 안경·2
그대는
내 창을 감금한 교도소다.
아니
감옥에서 세상으로 뚫린
세상을 향한
창일 뿐이다.
(임신행·시인, 1940-)
+ 안경
이런
너는 두 다리를
귀에다 걸치고 있구나 아직
한 번도 어디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다리여
그러나 가야할 곳의 풍경을 다 알아서 지겨운 다리여
그렇구나 눈(目)의 발은
귀에다 걸치는 것
깊고 어두운 네 귓속
귀머거리 벌레 한 마리가
발이란 발을 모두 끌어 모으고 웅크리고 있구나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보고 듣는다는 것의 고역이여
얼마나 허우적거렸기에 너는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법을 배웠을까
콧등 훌쩍이는 이 터무니없는 생각들
콧등 아래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이 형편없는 나의
眼目들
(유홍준·시인, 1962-)
+ 안경 속
눈 위에 눈을 달아
눈 속에 눈을 담아
먼 산을 본다
그 먼
산마루에 안개가
자욱하다
(이승익·시인, 1951-)
+ 돋보기 안경
나는 내 나이가 몇인가
모른다네
다만 내가 책을 볼 때
돋보기 안경을 써야만
책을 볼 수 있다는
나이가 됐다는 것뿐
나는 내 나이가 몇인가 모른다네
푸른 강물이 흐르고
흰 구름이 지나가고
너울너울 춤추는
황혼에 바람이 스쳐서
저 멀리 돌고 돌아온
길고도 긴 세월이 나도 모르게
살며시 내 옆에 놓고 간 게
돋보기 안경이라네
(최수홍·시인, 전북 부안 출생)
+ 검은 안경
세상과 나 사이를 차단하기 위해,
나는 검은 안경을 쓴다. 또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위해, 하늘, 구름, 나뭇잎 …
그리고 냇가에 앉아 있는 그대 모습.
(박희진·시인, 1931-)
+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
아빠는 검은 안경을 끼고 오셨어요
어둔 밤이 와도 검은 안경은 벗지 않으셨어요
내가 아빠 얼굴을 바라볼 때면
검은 안경을 낀 아빠는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아빠는 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세요?
아빤 왜 검은 안경을 끼세요? 하면
내가 너무 눈부셔서 고개를 숙인 거래요
내가 너무 눈부셔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거래요
너무 눈이 부시면 눈을 다치거든요
아빠가 그랬어요 나와 헤어질 때
검은 안경을 낀 아빠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내가 너무 눈부셔서 눈을 다친 거래요
선물 많이 사 가지고 또 올게,
눈이 다 나으면 올게 약속했는데요
아직 눈이 다 낫지 않았나 봐요
아빠를 기다릴 때 해를 바라보는데요
눈 다친다, 내 등을 쓸어주시던 아빠 손이 느껴져서
뒤돌아보면 내 눈은 캄캄해지고 눈물이 나요.
또 아빠가 보고싶으냐? 잘 생긴 네 얼굴이 아빠야,
원장님이 지나며 똑같은 말씀을 또 하시겠죠
(강미정·시인, 경남 김해 출생)
+ 안경을 끼고 나니
난시의 내 눈에 안경을 꼈네
세상이 참 잘 보이네
시야가 흐리고 피곤하더니
모든 게 또렷하네
사람이 둘로 보이고
돈이 겹으로 보이더니
다 허상이었네
여태 이중의 잣대로 세상을 보았었네
바람기가 일기 시작하는 혼란스런 가을날
안경을 끼고 나니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아내도 하나였네
눈이 나쁜 사람은
안경을 써야 하는가 보네
(양전형·시인, 제주도 출생)
+ 안경을 벗으면
안경을 벗으면
일상이 훨씬 가벼워진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그렇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렇고
내 어깨 위로 내려앉는
삶의 무게 또한 그렇다
다시, 부드러운 수건으로 안경을 닦고
세상을 바라보면
거기, 낡은 행주치마처럼
구겨진 일상이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한
낡고 빛 바랜 행주치마를
표백하고 다림질하면
일상이 한결 가벼워지려나
(권복례··교사 시인, 대전 출생)
+ 안경
바스트가 거시기한 것도 아니고
웨스트가 거시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이 호수 같기를 한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들 하지요
하지만
호수 같은 내 눈이 안경에 가려서
그대에게 보여줄 수 없어
울었지요
그러나
그대의 호수 같은 눈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은
내 호수 같은 눈을 가린 안경이지요
(권복례·교사 시인, 대전 출생)
+ 마음의 안경
을씨년스러운 밤거리에
처진 어깨들을 찬바람이 감싼다
밤하늘에는
성근 별이 빼곡이 수놓아
하늘조차 여백이 안 보인다
저 수많은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질 않을 것이다
서러워 순간에 분노하는 눈으론
밤하늘에 별을 다 볼 수가 없다
깊은 밤에
뼛속이 시리도록 겸손해져
자신을 조용히 들여다볼 때
별은 가슴에 날아들고
영롱하고
성글은 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최홍윤·시인)
+ 내 마음의 안경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부모 없는 산골 아이
손목만큼이나 가는 목을
책상 위에 떨어뜨리고
흐릿한 책글씨에
껌벅이며 눈을 맞추는 아이
더 맑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그 아이를 위해
나는 예쁜 안경을 선물하고 싶다.
혹 아이가 너무 무겁지 않는
작고 예쁜 걸로
아무도 모르게
아이만 아는 우리들 눈빛으로
그래서 먼 미래가 보이는
투명한 내 마음의 안경을 선물하고 싶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나와 함께 꿈을 꾸는
감사하는 아름다운 미소보다
반짝이는 아이의 눈에게
내가 더 감사하는 눈이 되고 싶다.
(이남일·시인, 전북 남원 출생)
+ 안경을 잃고
흐린 아침
녹색 칠판 앞에
눈먼 선생 망연히 앉아 있고
아이들은 안개 속에 떠 있다
어두운 도시 어느 길목을 서성거리며
무얼 보고 있을까 너는
무얼 두려워 간밤 너를 버렸나
눈앞 막아서는 벽 넘으려 했나
네 작은 흠집에 화를 내며
중앙선 넘어서는 욕망의 궤도에서
간밤 나는
세상과 정면충돌했었나 보다
네 그림자 덮인 내 영혼의 백지 위에
그리움이란...
분필이 닳도록 쓰고 또 써도
채워지지 않을 우리들의 주제
잃고 나서야 보고 싶구나
네 눈동자
깨끗한 얼굴
우리들의 풍경을
(현상길·교사 시인, 1955-)
+ 원시(遠視)
가까운 건 안 보이고
먼 것이 잘 뵈다니
찬물이나 마시고 속차릴 나인가
하마 철 들 때가 되었다신가
아들의 안경알에 비누를 칠해 두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깨끗하게 닦아준다 몇 살 먹지도 않은 놈의 안경알이
왜 이리 두꺼운지 두 손가락에 느껴지는 촉감이 어둠보다
더 두껍다 날마다 무거운 오목렌즈를 걸치고 세상의 원근을
헤아리고 있는 너는 고도근시, 나는 중등도 근시다 한 삼십여년
전쯤 가난했던 내 아버지가 서울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종로의
천보당안경점으로 데려가서 최고급 안경을 맞춰주시던 심정을
오늘에서야 이해할 만하구나 제대로 먹이지는 못해도 눈이라도
환하게 해줘야 한다면서 지갑을 터시던 아버지의 뜨거운 눈시울이
지금 내 눈앞에 와 있다 오늘 아침 문득 아들의 안경알을 맑은 물로
헹궈주면서 두꺼운 어둠을 닦아준다
(허문영·시인, 강원대 약학과 교수)
+ 나는 안경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맑은 물에 헹궈낸 빨래처럼 흔적도 없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여, 그래서 안경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 누군가 나에게 사내다워져야 한다고, 솔직해야 너답지 않으냐고 충고한다면, 나는 내 속을 뒤집어 보일 것이다. 젊은 여자의 살 냄새도 훔치고 싶었고, 위선을 연출하는 벼슬아치의 의자를 탐하기도 한 일이 있었다고…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모두 어둠으로 잠겨버리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그래서 안경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
이 사실을 어머니도, 곁에서 코 골고 자는 아내도 모르고 있다.
이순(耳順)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나의 중심이 보고 싶어졌다. 평생 가까운 것은 보아도 먼 것은 보지 못하는 근시안인 나의 중심. 나무를 못 보니 숲이 보일 리 없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방금 꾼 꿈도 현실로 불러오지 못하는 나의 초라함이여.
오늘도 안경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
보고 싶은 나의 꿈, 더러는 잠들어 있는 나의 중심.
(김용언·시인,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