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관한 시 모음> 박인걸의 '엄동설한' 외 + 엄동설한 혹독하게 추운 날이면 아버지의 고독이 떠오른다. 극빙(極氷)의 가난과 싸우며 얼음장같은 세월을 보냈다. 전쟁의 폐허더미에서 한 톨 쌀알을 골라내며 부서진 널빤지를 모아 가산(家産)을 일으키신 억척 지게를 짊어진 어깨에 가족이 매달려 허리가 휘고 갈퀴가 다 된 손발은 아등바등 살아온 흔적이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겨울의 한복판에서도 의연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박인걸·시인) + 동장군 동장군은 가녀린 산새들 심장을 쪼아먹고 자란다. 동장군은 흙 밑의 숨죽인 풀씨들 신음소리를 먹고 살이 찐다. 동장군은 가난한 사람들 한숨소리를 듣고 더욱 용맹해진다. 동장군은 언제나 나이를 먹지 않는 미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드디어 동장군은 보잘것없는 우리집 뜨락의 작은 꽃밭에 짚동의 옷을 입고 들어앉는다. 봄이 올 때까지 동장군은 우리집 뜨락을 떠나지 못하고 섭섭해한다. 이보게, 우리 오래도록 함께 살세. (나태주·시인, 1945-) + 동장군 출근길 가로막고 사랑 한번 해보자고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모가지부터 아랫도리까지 더듬으며 쫓아와 종종걸음으로 피신한 지하철 입구 에스컬레이터 제까짓 것 생각 없고 넉살 좋아 기세 등등하게 식식거리지만 심해까진 따라오지 못하겠지 허술한 미니스커트 매무새인 앞선 아가씨 나보다 더 파렴치하게 당했나보다 자꾸만 코를 훌쩍대는 것이 느닷없이 시공 초월한 유년의 초가삼간 그땐 더 악랄했지만 샘물이 따듯해 문고리 시켜 손가락이나 잡아보려는 아기자기한 낭만이 있었는데 (권오범·시인) + 동장군 한 폭 베일로 천심을 가리고 독 가시 품은 목으로 핏빛으로 울부짖는 탐욕들 쫓아가며 부러질 듯한 허리 이고 지고 오욕과 질시에 찌들어 지우지 못할 영혼에 땟국이 흘러 복날 개 혓바닥 지쳐 내밀듯 파랗게 죽어 가는 혼백들 사이로 하얀 이빨 보이고 싸늘한 웃음 뿌리며 동장군이 지나간다 (이재기·시인, 1938-) + 강추위 네 아무리 꽁꽁 세상을 다 얼어붙게 해도 님 향한 내 발걸음 막아서지 못하리 님 품은 내 가슴은 얼리지를 못하리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 겨울-한파(寒波) 예고도 않고 다리를 걸친다 있는 대로 가랑이를 벌리고는 이쪽 저쪽을 꽉 묶어 놓는다. (전병철·교사 시인) + 한파주의보 꽁꽁 얼어붙은 대지 위로 뽀하얀 잔설이 수를 놓고 겨울 내내 영하 15도의 한파주의보 어제 쪼잘대던 버드나무 위 까치는 밤새 괜찮은지? 노천 논 위의 스케이트장은 아이들의 세상 넘어지고 넘어져도 신나는 세상 전동차 객실 난방은 1050W 모두 틀어도 춥다고 아우성이다 지금은 한파주의보 발령 중! 얼어붙은 대지와 움츠린 사람들의 얼굴에 따스한 햇살 비추는 그 날 들판에서 한파와 시름하는 들풀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시험하고 있다. (윤용기·시인, 1959-) + 한파 소한이 데려온 엉큼한 것 빈틈 보이면 다짜고짜 욕정에 시동부터 걸어 사랑하다 죽은 귀신인 양 안달복달 매무새 단단히 여몄건만 어디로 손 디밀었는지 등골이 오싹하도록 앙가슴 더듬질 않나 입술부터 귓불 핥느라 식식거려 나까지 콧김 나게 만드냐 남의 살 냄새가 그렇게도 그립거들랑 하다못해 시장통 좌판에 정신 나가 알몸으로 누운 물 좋은 생태라도 뼈가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뒹굴지 어쩌자고 다 늙어가는 몸 따라다니며 사정사정하는지, 원 공복으로 게슴츠레해진 눈 씀벅일 때마다 찔끔거리게 주물러 손등으로 훔칠라치면 손가락 끄트머리마다 얼얼하도록 애무해대는 이 빌어먹을 사랑에 환장한 것 같으니라고 (권오범·시인) + 삶과 주검의 한파 그대여 보고 있느냐 사회에서 낙오되고 세파에 내몰린 주검들을 그리하여 그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 지하도 계단은 극한 추위에 냉각된 지표들이 긴 침묵의 동면을 그리고 있더라 불길에 어느 오그라진 손을 보았다 낙하하는 가벼운 나뭇잎 같은 목숨 하나 보았다 염병 삶만큼 거룩한 일도 없는 것이다 꺼질 듯 죽어가는 숨소리를 조문하며 추위에 웅크린 저 만연한 절망들, 나는 알았다 잠들 곳이 있는 있다는 것은, 따듯한 내 방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기적이며 눈물나게 감사할 일이냐 21세기 인간의 비정은 극에 달했다 우리는 가난을 보고 더욱 비굴해져라 종용한다 마치 귀한 품종의 족속들처럼 추위에 얼어 죽어간다는 것은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냐 아니면 힘과 권력에 의해 죽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암울한 고통과 분노를 남길 것이냐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감각이 굳어가는 심지에 마지막 불꽃같은 화려하고 따듯한 천국을 보고 있었을까 그들은 보고 있느냐 그대여 가난 위에 짐짝 같은 세상 위에 저 버려진 사람 위에 다시 싸늘한 주검 위에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 간다 영롱한 햇살에 수정처럼 반짝이며 여섯 개의 투명한 꽃잎을 펼쳐 헤엄쳐 오는 하이얀 눈송이들 저것은 세상을 굽이치며 흘리던 그들의 눈물이다 버림받고 무시당한 설움의 흔적이다 우리가 누리는 무심한 행복의 대가는 그들의 절망이며 혹여 그들에게 아주 사소한 희망이 된 적은 없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설을 쇠고 얼마나 많은 떡국을 삼켰기에 이리도 질겨져 버린 것이냐 어찌하여 이리도 몰염치한 삶을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버젓이 살아가는 것이냐 (고은영·시인, 1956-) + 추위 타는 이 나이에 와서 엄동의 긴 겨울 헐벗은 나무처럼 추위 타는 이 나이에 와서 생각해 보니 산다는 것은 별것 아닌데 세상 고민 몽땅 혼자 끌어안고 속앓이 고혈 앓으며 아등바등 허기진 어리석은 삶. 세월 속에 옹으로 남기고 언제고 훌쩍, 아주 후울쩍 단절의 하이얀 면사포 쓰고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할 때 좀더 사랑하지 못했던 좀더 나누어주지 못했던 움켜진 십자가를 그으며 깊은 가슴 건네주지 못했던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낮은 침묵, 미안한 자리 안녕 안녕!! 이라는 이 말 한마디밖에 (박송죽 미카엘라·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