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군도
어느 제왕도
여성의 샅에서 태어나지 않는 자는 없다
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어떤 불경의 사나이도
밤이면 지어미의 다리 아래 엎드려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되고 마나니
근육질의 여성을 기르려는 욕망이여
부질없고 부질없도다
지배하지 않아도 세상은 그녀들의 발아래 있다
여성, 이 지상의 어머니들은
그가 만든 모든 인간들의 정결한 눈물로
꿈이 되고
사랑이 되고
신앙이 되고
가장 빛나는 별이 된다
태후이며 왕비인 여성이여
굳이 제왕으로 군림하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그대들의 손안에 있다.
(임보·시인, 1940-)
+ 바람 부는 날이면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인숙·시인, 1958-)
+ 여자를 말하다
그녀는 몸 속에
우물 하나를 감추고 산다
사랑이 가만히 가리키는 곳
남자는 밤마다 두레박을 드리운다
시득시득 시들어가는
꽃대의 중심을
일순간에 살려낸다
신께서도 없는 능력을
그녀가 가졌다
여자는 이 세상의 또 다른 종교다
(이영혜·시인, 강원도 인제 출생)
+ 여자라는 나무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너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고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이기철·시인, 1943-)
+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화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문정희·시인, 1947-)
+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어머니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면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다.
우리들이 항상 무엇을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그 참모습을 알게 되듯이
어머니가 혼자만 아시던 슬픔
그 무게며 빛깔이며 마음까지
이제 비로소
선연히 가슴에 차오르던 것을
넘쳐서 흐르는 것을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신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 옛적 마음을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저도 또한 속 깊이
그 어머니를 갖추고 있나니
(이성부·시인, 1942-)
+ 걸레질하는 여자
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
엉덩이를 들어야 한다.
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
큰절 올리는 몸으로
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
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
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
오라는 곳 없어도 밤낮없이 찾아오고
누구와도 섞여 한몸이 되는 먼지들:
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먼지들도 그만 승복하고
고분고분 걸레에 달라붙는다.
걸레 빤 물에 섞여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렇게 그녀는 방과 마루에게 먼지에게
매일 五體投地하듯 걸레질을 한다.
(김기택·시인, 1957-)
+ 도시의 여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간편한 바지를 입을까,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현란한
스커트를 입을까,
머리를 풀어헤쳐 사자 흉내를 내본다.
머리를 틀어올려 꽃뱀 흉내를 내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세는 아무래도
IMF
맞붙어 싸우고 명예퇴직을 당하기보다는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는 뱀이 더
현명하겠다.
출근길,
날렵하게 스커트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 보는 도시의 여자,
무슨 탈을 쓸까,
붉은 루즈를 입에 물고
우는 얼굴 위에 그려 넣는 웃는 얼굴,
슬픈 얼굴 위에 그려 넣는 즐거운 얼굴,
(오세영·시인, 1942-)
+ 호떡 굽는 여자
거리에 오고 가는 이 없어도
그 여자는 호떡을 굽는다.
어젯밤
잠 설치면서 만든
밀가루 반죽에서 풀려난
밀가루 요정들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춤추고
꼬마들은 침을 삼킨다.
호떡 하나에 사랑과 미움
그리고
징검다리 같은 아이들 학원비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회오리바람으로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압핀 같은 오늘을 눌러서
그 여자는
꿀처럼 달콤한
내일의 호떡을 굽는다.
(박명근·시인)
+ 매맞는 하느님 - 여성사연구 4
깡마른 여자가 처마 밑에서
술 취한 사내에게 매를 맞고 있다
머리채를 끌리고 옷을 찢기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나동그라지면서
음모의 진 구렁에 붙박혀
증오의 최루탄을 갈비뼈에 맞고 있다
속수무책의 달빛과 마주하여
짐승처럼 노예처럼 곤봉을 맞고 있다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쓰러진다
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 맞고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여자 속에 든 할머니가 매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는다.
여자 속에 든 하느님이
매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고 윽 하고 죽는다
여자 속에 든 한나라의 뿌리가
매맞고 피 흘리고 비수를 꽂으며 윽 하고 죽는다.
깊은 밤 사내는 폭력의 이불 밑에 잠들고
세상도 따라 들어가 잠들고
오뉴월 한 서린 여자의 넋 속에서
분노의 바이러스가 꽃처럼 피어나
무지개 빛깔로
이 지상의 모든 평화를 잠그고 있다
아아 하늘의 씨를 말리고 있다
(고정희·시인, 1948-1991)
+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여자 없는 벽 속에서 오랜 세월 빛 바래가면
여자는 얼굴도 구별도 형체도 사라지고
오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흰 살로,
깊고 촉촉하고 아늑한 품으로,
둥그스름한 젖가슴과 엉덩이 능선으로 안개 속 해처럼 떠오릅니다
그런 여자를 꿈꾸고 난 새벽이면 누운 채로 아득히 그리움에 출렁입니다
여자여 여자여 흐르는 새벽 강물이여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여자가 왜 남자보다 키가 작은지 아십니까?
여자가 왜 남자보다 힘이 약한지 아십니까?
자궁과 젖가슴을 집중해서 발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생명을 낳아 기르기 위해
키 크는 성장도 싸우는 강함도 멈춰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미래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속이 깊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강인한 겁니다
미래를 위해 기꺼이 키 작아지고 힘 약해지는 것입니다
불덩이 시대의 사랑을 품고 오늘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사람아
자기 성장의 강한 힘을 안으로 들이부어 희망 하나 키워가는 사람아
미래를 낳고 기르기 위해 기꺼이 작아지고 낮아지는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