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누구보다
마지막에 울어야 한다
한 방울 비가 되어
모두에게 가야 한다
(송정숙·시인)
+ 시인은
어디서나 문 열고
단 하나의 말을
찾아나선 이여
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봄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여
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
때로는 엉뚱한 곳에
둥지를 트는 새여
즐거운 날에도
약간의 몸살기로
마음 앓는 이여
잠을 자면서도
다는 잠들지 않고
시의 팔을 베는
오늘도
고달픈 순례자여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시인의 영혼
겨울 햇살이 하루를 접고 붉은 석양이 내릴 무렵
나의 언어도
강에 일렁이는 물 비늘 속으로 눕는다
겨울 산 벌거벗은 민둥으로
영혼을 흔드는 시를 날려보내자
돌 틈을 흐르는 계곡물이 사강(沙江)에 다다를 때
이미 사해(死海) 속으로
시인의 언어가 죽어버린다 해도
시는
영혼을 흔들어 태어나고
언젠가는 다시 시인의 영혼으로 돌아온다
시는
인생의 둘도 없는 보물이 되어
보석처럼 빛이 반짝이는 삶을 만들어 간다
시인은 살아있는 영혼 속에서
영혼을 흔드는 시를 노래한다
떠난 후
가난한 영혼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살다간 흔적으로
(조사익·시인)
+ 시인의 일상
갖는 것은 즐거움
버리는 것은 상쾌함
즐거움을 누린 만큼
쾌감도 느껴야만 한다.
스스로를 비우는 자는 상쾌하다.
내 몸 안의 숙변을 뿜어내듯이,
스스로 버리지 못한 욕심
곽 막힌 체증과도 같다.
담는 즐거움
덜어내는 상쾌함
내 안에만 머무를 때
돈도, 지식도, 음식도 썩고 만다.
먹는 것은 즐거움
배설하는 것은 쾌감
담았을 때의 쾌감만큼
비우는 즐거움을 누리자.
세상 만물 내 안에 담았다가
즐겁게 내어주는 큰 그릇이 되자.
즐거움이 나에게서 상쾌하게 넘치게 하자.
우주의 만물은 모두
즐겁게
상쾌하게
흘러야 맛이다.
오! 나의 하느님!
오늘도
상쾌하게 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정환웅·시인)
+ 시인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김광섭·시인, 1905-1977)
+ 미인과 시인
아이들은 나를 보고
<미인>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의 눈으로는
미인의 조건이 나 정도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나보고
<미인>이라고 말해 주던
참 귀엽고 예쁜 아이들의
손을 꼬옥 붙들고
<얘들아, 미인이 뭐야?> 물으니
<선생님처럼 시를 잘 쓰는 사람이에요> 한다
아하, 그랬구나
그러면 그렇지
(권복례·교사 시인, 1951-)
+ 시인 본색(本色)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시인, 1945-)
+ 늙은 시인의 노래
삶의 푸념도
노래가 되고
지워버린 사랑도
추억이 되는
늙은 시인이 되고 싶어라
그리움의 날들이
하늘이 되고
기다림의 날들이
바다가 되어도
초연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늙은 시인이 되고 싶어라
약속 없는 기다림을
혼자 만들다가
붉은 노을에
눈시울을 적셔도
새겨진 주름을
웃게 만드는
늙은 시인이 되고 싶어라.
(박우복·시인)
+ 어느 시인에게
님께선 다음 생에도 사람되겠다 그러세요
이 세상 힘드셨어도 다시 가겠다 그러세요
세상에 다시 오셔서 시인이 되어 주셔요
사람을 사랑하느라 미처 못다 안아 주신
작은 풀꽃 작은 벌레 작은 돌멩이에게도
하나씩 이름 불러 葉書詩 적어 주셔요
님께선 다음 생에 꼭 다시 돌아오셔요
못다 적은 시가 아직 많다고 그러세요
못다 비운 그리움 두고 오겠다 그러세요
(강인호·시인)
+ 시인은 모름지기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 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김남주·시인, 1946-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