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에 관한 시 모음> 김낙영의 '목욕탕에서' 외 + 목욕탕에서 때를 벗겨야 한다. 육신의 때도 벗겨 버리고 삶의 묵은 때까지도 모두 버려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물들을 두꺼운 옷으로 감추며 살아왔는가. 이제 허물을 가려온 가식의 옷은 벗어버리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삶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한증막 속에서 뽀송한 땀방울 솟아오르듯 삶의 거품을 빼고 태어날 때의 그 순수함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김낙영·시인) + 목욕 아무리 씻어도 내장까지는 다 씻어낼 수 없잖아요? (나태주·시인, 1945-) + 아침 목욕 아침에 목욕을 하며 거품에 실어 전날의 기억을 보낸다 세상사로 채워지기 전에 빈손임을 확인하게 하니 목욕은 도이다 아침마다 목욕을 하여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축복이다 (정진기·시인) + 샤워 샤워하는데…… 당신 몸이 제게서 흘러내립니다. 그대 손과 입맞춤, 체온, 숨결과 가슴과 다리와 팔, 머리카락과 눈빛까지 마치 허물을 벗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이란 말이 맞는 느낌입니다. 당신 그리워서 눈물 흘리니 가슴 맑아지고 착해지고 깨끗합니다. 그제서야 제 뺨과 어깨, 가슴과 배, 다리를 타고 당신 마음이 흘러내립니다. 편안하게 잠들라는 당신 인사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머언 욕실까지 가까운 제 몸까지 당신 몸과 마음 따라와 주셔서. (김하인·시인, 1962-) + 그리움 풀어내는 사우나의 명상법 땀이 난다. 차이고 막힌 그리움,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모래시계는 3분마다 적멸공산(寂滅空山), 짧게 비우고 단문의 법문, "물처럼 흐르게 해야 그게 사랑이 아닌가." 온몸으로 던져진 우주의 뜨락에 몽글몽글 타며 서리는 그대의 말, "물처럼 살아라 땀처럼 버려라." 그리움의 명상법, 땀으로 풀고 있다. (정영자·평론가 시인, 1941-) + 두 아들 - 목욕탕에서 목욕탕에 가면 나는 꼭 두 아들에게 지시하는 것이 있다 다름아닌 서로의 등을 밀어 주라는 것이다 항상 집에서는 티격태격하길래 발가벗은 목욕탕에서 서로의 몸을 보고 어루만지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형제간의 정을 깊이 나누라는 뜻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비록 표현은 않지만 뭔가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안다. (전병철·교사 시인) + 샤워를 하면서 몸이 천근 만근 파김치 될 때 따뜻한 물줄기로 한바탕 샤워를 하고 나면 새살이 돋아나는 듯 상쾌해지는 몸뚱이 정신의 묵은 때 한 꺼풀만 벗길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홀가분해질까 (정연복·시인, 1957-) + 목욕하는 날 오늘은 목욕하는 날. 여러 날을 참고 지낸 때꼬장물이 흘러, 난간도 인도도 차도도 아이들 물놀이처럼 신이 났다. 선명한 세상을 위해 축복처럼 내리는 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저 우리의 희망만큼 소박한 풍요를 내리소서. 새벽 통근버스의 차창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빗방울, 작은 하나의 세상, 의미 있게 다가와 무언의 메시지를 주는 사명감을 가지고 빗방울의 일생을 다하고 용감하게 사라지는 모습.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신의 시그널. (이성희·시인) + 목욕탕에서 목욕탕에서 옛 친구 정화를 만났네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했다며 검정 비닐로 왼쪽 가슴을 애써 감추고 있는 정화 가슴을 싸안고 있는 오른 팔의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서면 안 될 것 같아 나 또한 제대로 눈길을 줄 수 없었네 정화야 착하고 따뜻한 내 친구야 네 몸에 깊게 패인 상처가 네 마음의 그늘까지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누구에게도 완전히 열리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빗장까지 만든 건 아닌지 네 그 넉넉한 마음까지 움츠려들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착한 친구 정화야 네가 내 친구로 다가올 때 그러했듯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도 너의 그 깊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소중한 사랑이 되었음을 기억해 네가 빛나는 건 그 크고 깊은 눈에 담긴 넉넉하고 깊은 사랑임을 생각해 깊고 고운 마음의 따뜻한 친구 정화야 이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는 너의 참 아름다움을 내가 느끼는 만큼 너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네 예쁜 등을 꼼꼼히 밀며 어느 순간 팔에 힘이 빠지고 안타까이 떨리던 내 눈빛을 너는 보았는지 모르겠구나 안타까운 내 마음을 너는 느꼈는지 옷을 입어야 편안해지는 친구가 아니라 목욕탕에서도 네게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 마음의 소릴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착하고 따뜻한 내 친구야 (김은숙·교사 시인, 충북 청주 출생) + 샤워장에서 - 2005, 을유년을 보내며 새해 병술년의 아침이 밝기도 전인 을유년의 마지막 저녁 시간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지체들을 다독거리며 1년 365일을 샤워로 말끔히 씻어낸다 골 때리는 일을 만났어도 터지지 않았던 머리통하며 흴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하며 제 기능을 잘 감당해 주었던 이목구비와 수족들을 적당히 비누로 문지르며 따뜻한 물로 감사하단 말을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며 부벼댄다 가장 애쓰고 수고를 많이 하였다고 생각되는 손, 오른손바닥으로 왼손을 왼손바닥으로 오른손을 위로하면서 문질러 주고 70킬로그램의 썩어질 육체를 1년간 잘 지탱해 준 두 다리, 두 발, 열 발톱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특별히 한 번씩 더 씻어내는 부분은 듣지 않아도 좋았던 것을 들었던 귀, 안 보아도 되었던 것을 보았던 눈, 혹시나 상처 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를 입 (오정방·시인, 194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