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의 나태한 하루가 오늘도 흘렀습니다.
저마다 옳다고만 되어 있는 세상에서 말수가 적은
저는 아무래도 덜 옳은 쪽이 아닐까 생각이
미칠수록 갑갑합니다. 보다 큰 목소리로 외칠수록
옳다고만 되어지는 터에서 부끄럼 많은 사내 하나가
밤마다 그리는 어머니 품은 어느 토방에서 지금도 도란거릴
화롯가의 여인과 젖을 먹는 갓난아기입니다. 어머니.
(배상득·시인, 1957-)
+ 우편 엽서
멀리 있는 당신께
엽서 한 장 고이 띄워 보냅니다
받는 이는 나를 기억하는 당신
보낸 이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
그리움 한 조각 우표로 꼬옥 붙이고
바람에 훨훨 띄워 보냅니다
많고 많은 사연 닳은 맘으로 쓰다 보니
뭉툭한 사연 추억에 금이 갈까봐
빈 엽서 한 장 띄워 보냅니다
어느 날, 바람을 타고 오는
빈 우편 엽서
한 장 받아 보시거들랑
할 말 다 못하고 그리움만 덕지덕지 붙인
간절한 이내 심사를
당신은 이미 알아보실 줄로 압니다
(진상록·시인, 1971-)
+ 물 젖은 엽서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당신 껴안고 싶었어요.
발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두근거리며
만져 보고 싶었어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수천 방울의 파도로 부서지며
꿈꾸고 싶었어요.
바다 끝에서
죽고 싶었어요.
(문정희·시인, 1947-)
+ 엽서, 엽서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 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김경미·시인, 1959-)
+ 엽서·1
저문 산을 다녀왔습니다.
님의 관심은 내 기쁨이었습니다.
어두운 길로 돌아오며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지만
내 말들은 모조리 저문 산에 던져
어둠의 깊이를 내 사랑의 약조로 삼았으므로
나는 님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 못 견딜 그리움들이 화약처럼 딱딱 터지면서
불꽃의 혀들은 마구 피어나
바람에 몸부비는 꽃들처럼
사랑의 몸짓들을 해 보였습니다만
나는 그저 산 아래 토산품 가게 안 팔리는 못난 물건처럼
부끄러워 입을 다물 따름입니다.
이 밤 파초잎을 흔드는 바람결에
남몰래 숨길 수 없는 내 사랑의 숨결을 실어
혹시나 님이 지나가는 바람결에라도
그 기미를 알아차릴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장석주·시인, 1954-)
+ 삼월에 보내는 엽서
우체국과 이웃하고 있는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보내야 할 편지와
받아보고 싶은 편지들이
날마다 수북하게 쌓였다
오늘은 화살나무가 잎을 피우고
어제는 산수유가 꽃을 피웠다
내일은 벚나무가 꽃을 화라락 피우리라
그리고 하르르 하르르
벚꽃이 지리라
그렇게
그리움이 피었다가 질 무렵
붉은 띠를 건물 한가운데에 두른
우체국 창구에도
수많은 편지들이 쌓이고 보내지고 하고 있을 즈음
바람이 어디서인가 불어와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듯이
두고 온 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우체국에는 가지 않았다
삼월이 가고 있었다
(권복례·시인, 1951-)
+ 사월의 엽서
어떤 꽃이든 영원함은 없다
자연에 순응하며 피고 지는 것을
꽃이 시든다고 서러워하지 말고
꽃잎이 전하는 사연에
마음 열어 둘 일이다
봄비에 꽃잎 젖고
춘풍에 꽃잎 날려도
사월의 봄볕아래
씨방은 튼실히 여물어 갈 테니
꽃이 시든다고 서러워하지 말고
꽃씨가 전하는 사연
마음에 고이 묻어 둘 일이다
(김경숙·시인)
+ 시월의 엽서
시월의 끝자리에 서면
쓸쓸한 마음
허전한 마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붉게 물든 계절
그대에게
그리움의 엽서를 띄운다.
푸르름으로 간직했던 마음
기다림 끝에는
타다가 남은 잿빛이지만
늘 하늘을 보며
고이 간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새들의 속삭임에도
쓸쓸한 마음
허전한 마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당신을 위해
늘 비워둬야겠다.
기다림은
마음 한구석에
타다가 남은 불씨 같은 것
잠시 휴식을 취하는 휴화산 같은 것
가을이 지나면
그대와의 추억이
빈 하늘에
서성이며 지켜보겠지.
(이제민·시인, 충북 보은 출생)
+ 십일월의 엽서
녹슨 깡통이구나
가을마저도.
모든 가로수가 환상을 접고
생존의 쓸쓸함에 잠기는 순간
넋을 지펴
네 곁으로 가리니
기억하라
텅 빈가지 끝에 저 혼자 남아
단풍 들지 못하는 은행나무 잎.
(이현우·시인, 1951-)
+ 봄 엽서
조그만 잉크병처럼
온갖 색이 든 조그만 병처럼
제 마음 조붓하게 만들어
그 안에 봄볕 모았습니다.
그 봄볕에다 눈물 섞어
잉크 만들어 넣은 만년필로
이 엽서를 씁니다.
당신에게
엽서 안 어떤 단어와 글자가
담겨 있든지 간에
당신은 제 마음 향기를
맡을 것입니다.
제 글씨 하나하나가
꽃으로 피어오를 제 엽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김하인·시인, 1962-)
+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시인, 1961-)
+ 가을 엽서
가을이다 소녀야
먼 어느 날
네가 나를 이 땅에 낳았을 때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이 깊어
이 가을에도 나는 네 곁을 서성이며
하늘에 매달린 사과알을 두 손에 받쳐들고
너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열리는
탄생과 죽음의 몸부림을 보느니
소녀야
너는 오래오래 늙지도 말고
그 자리에 그렇게 하늘 이고 서서
들녘의 바람을 재우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낳도록 하렴.
(정성수·시인, 1945-)
+ 겨울엽서
그리워하다 하다
숨길 수 없는 마음
함박눈처럼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폭설처럼 쌓여있는 사랑을 이야기하자
어디에도 숨을 곳 없는 그리움을 이야기하자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간절함에 대해 이야기하자
하늘의 별들이 숨을 거두는 그 날에도
오늘이 영영 오늘로 살 수 없는 그 날에도
여전히 우리로 살아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우리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희숙·시인, 1964-)
+ 그림엽서
펜을 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손이 없는 사람들이 가르쳐 주었네.
성탄절과 새해를 맞는 사람들의 축복을 위해
붓을 발가락으로 잡거나 입에 물고 그렸다는
그림엽서 한 묶음
그 눈물어린 그림들이 내 귀에 속삭였네.
이렇게 성한 두 손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축복인가를.
한 묶음 엽서 값으로는 사지 못할
깨우침을 부려놓은 아름다운 그림들!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다가오는 새해를 위해
누구에게나 복을 빌어주고 싶은 때에
이 그림엽서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내게 실어 온 축복을 전해 주기를!
빨간 포인세티아 화분이 놓인 가슴속
내가 누리는 이 기쁨을
저들도 함께 누리게 되기를!
댕 댕 댕 댕
성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려주는
새해 소망의 연을 높이 띄우기도 하는
그림엽서,
낮은 처마에 닿을 만큼 눈이 쌓이는 저녁
추녀 밑으로 굴뚝새가 날아들 듯이
등불이 켜진 집 그 따뜻한 안으로
누구라도 맞이할 듯한
인정이 가득한
그림엽서를 한 장씩 보낸다.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