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안개는 몸에 해롭대요
치마 벗고 밤거리에 나선
누군가의 아낙.
(나태주·시인, 1945-)
+ 가로등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지른다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
(이시영·시인, 1949-)
+ 가로등
밤은 깊은데
아직 눈을 붙이지 않은 가로등.
시계바늘소리 같은 四月의 비가
내릴 때나,
밤나무 가지 끝에
十月의 찬바람이 걸릴 때나,
언제나 밤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가로등.
이따금씩 찾아와
한 바가지 슬픔을 쏟아내고 사라지는
열차의 기적이 울릴 때에도
약 한 봉지 분량만큼의
향수를 달래가며,
오늘도
어둠의 속살과 밀애를 나누는
가로등.
(전성규·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가로등
철기둥 꼭대기에
슬픈 애꾸눈이
거리의 어둠 지우느라 핏발선다
아물아물 멀어져가는 골목까지
늦은 발자국 소리
데려다주고 오는 외눈부처
철부지의 방황 바라보며
오래오래 기다려주던
어머니,
밤 지새도록 외발로 서서
새벽녘 마지막 어둠을 개키고
장승처럼 섰다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가로등
저 계집애
꼬락서니 좀 보라지
벌써 오랜 동안을
지루함도 잊은 채
뻔뻔스런 얼굴로
술 취한 행인의
심술궂은 추파도 견디며
꼿꼿이 서서는
꼼짝을 안 하네?
아무래도 오늘 밤
바람맞은 게야
(이민정·시인)
+ 가로등
달님도 아닌 것이
해님도 아닌 것이
밤이 무서워서
어둠이 싫어서
낮에는
눈 비비며
실눈 뜨고 살다가
밤에는
초롱초롱
골목대장 되었네
(김옥진·시인, 1962-)
+ 어느 가로등
어둠이 짙게 깃들인
아파트 뜰 안 길목에
가로등 하나가 우뚝 서
켜져 있다.
그 짙노란 불빛은
희부연 램프를 통해 비춰서
더없이 은은하고 정겹다.
마치 그 등불은 밤길보다
나의 마음속 어둠을 비춰서
내 안의 풍랑도 자게 하고
표류하던 내 삶의 향방도
잡히게 할 것 같다.
한밤내 자신을 뉘우치며
홀로 기도하는 수도자처럼
敬虔하게 서 있는 등불
그 불빛에는 눈물이 어려 있다.
그 불빛에는 사랑이 어려 있다.
(구상·시인, 1919-2004)
+ 가로등을 보면서
모두가 비상을 꿈꿀 때도
네 꿈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부와 명예를 위한 관심도 없다
오직 살고 싶은 생명을 위해
고압전류에 온몸을 녹이면서
빛살을 아낌없이 뿜어댄다
어두울수록 눈부신 너는
그 찬란한 열꽃을 피우면서
꿈을 잉태하는 동화가 된다
너를 닮고 싶다
누더기 같은 마음을 털고
몸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너처럼 살고 싶다
비릿한 허욕과 결별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아름다운
(김민소·시인)
+ 가로등
밤새도록 골목길을 지킨
고개 숙인 가로등이
벌건 눈알을 비비며
밝아오는 아침을 맞는다.
철야기도 하는 어머니처럼
전선을 지키는 초병처럼
긴 밤을 새우는 불빛은
거룩한 성직자 같다.
칠흑 같은 어두움에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거친 비바람 부딪칠 때면
달랠 길 없이 외로워도
수년을 하루같이
밤마다 등불을 든 사명자여
골목길만 비추지 말고
어둔 마음까지 비춰주려무나
(박인걸·시인)
+ 가로등 연가
밤의 열기로 일어서는 어둠의 빛
늦은 귀가를 염려하는 빛의 은혜로움,
외진 곳 허름한 집을 찾아가는 무거운 발걸음과
휘황한 궁전으로 향하는 가벼운 으스댐과
모두가 그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툭툭 빛의 몸뚱이를 발로 차며
돌아가는 사람들,
그때마다 못명한 빛은 눈물처럼 흩어지고
미명의 시간,
노동의 새벽을 지고 가는 사람이거나
술 취한 타락의 건달이거나
날렵한 도적의 무게 없는 발걸음까지도
낱낱이 기억하며 눈감아주는
저, 메마른 가슴으로 피워내는 빛의 길,
오직 한곳에 머물러
연인처럼,
어두운 세상의 눈이 되어주는 푸른 등대 같은 것.
(박종영·공무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