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지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김현승·시인, 1913-1975)
+ 나의 꿈
돌멩이로 빵을 만든다
흙으로 밥을 짓는다
풀잎으로 반찬을 만든다
강물로 국을 끓인다
함박눈으로 시루떡을 찐다
노을로 팥빙수를 만든다
이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정호승·시인, 1950-)
+ 애기의 꿈
애기의 꿈속에 나비 한 마리
어디론지 날아가고 햇빛만이 남았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난 애기는
창구멍으로 방바닥에 스며든 햇빛을
눈 대보고, 뺨 대보고, 만져 보고 웃는다.
엄마도 애기 같이 이렇다면은
세상은 정말로 좋을 것이다.
(서정주·시인, 1915-2000)
+ 꿈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낮에 본 꽃이 눈 안에 가득 자리를 잡는다
마치 이른 새벽
꽃시장 골목을 뒤지는 발길처럼
촉각은 망막에 꽃씨를 뿌리며
봄,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흙을 뒤집는 꿈을 꾼다.
(문인귀·시인, 1939-)
+ 꿈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지
논두렁 개울가에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밥 먹으라는 고함소리도
잊어먹고
개울 위로 떠가는
지푸라기만
바라보는
열 다섯 살
소년이 되어보는
(서홍관·의사 시인, 1958-)
+ 해녀의 꿈
욕심 없이
바다에 뛰어들면
바다는
더욱 아름다워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랑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암초를 헤치며
미역을 따듯이
전복을 따듯이
힘들어도
희망을 꼭 따오겠어요
바다 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지만
다시 뭍으로 올라와야지요
짠 냄새 가득 풍기는
물기 어린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ㅡ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꿈
1
빈 언덕 위에
키 큰 상수리나무 하나를 둘 것
그 아래 방 한 칸짜리
오두막집을 둘 것
그리고 하늘엔
노을 한 자락도 걸어 둘 것.
2
흙내 나는
오두막집 방안으로 돌아가고 싶다
따스한 아랫목의
잠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외할머니
옆에 계시고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하고 속살거리는
상수리나무 마른 잎
무엇보다 먼저
내 몸이 작아지고 싶다
(나태주·시인, 1945-)
+ 꿈
주렁주렁
매달린
꿈
턱 괴고 모로 누워
그저 절로
떨어지기만
농익은 꿈이
짓물러 터지면
허사인걸
나무에 올라가
가지 흔들어
작대기로 후려쳐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니야
(공석진·시인)
+ 개꿈
개꿈을 꼬치꼬치 물어볼 필요는 없다
까닭 없이
주먹질하고 도망치고
쓰러지고 붙잡히고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바윗돌에 부딪치고
절벽에서 실족하는 순간
그 실족이 나를 구했다
그래도 이 고마운 구조를
개꿈이라고 하기엔
아깝다
(이생진·시인, 1929-)
+ 어느 날의 꿈
그대 세상에 나를 심어요
빈들 채우는 실바람처럼
나는 당신의 거목이 되어요.
세상이 나를 위해 없는 것처럼
나를 위한 당신이 숨겨진 것처럼
나는 당신을 위해 곡괭이를 들어요.
일기장에 당신을 매일 묻어요
책 안에 읽던 곳 표시하는 것처럼
내 맘에 매일 갈피를 꽂아요.
새벽은 도둑 비에 젖어요
녹슨 종탑 십자가가 녹는 것처럼
나는 당신에게 스며요.
(김현영·시인)
+ 오늘 밤 꿈속에선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조촐한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오면서
우리의 장래를 약속할 수 있는
한 남자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예쁜 딸아이를 낳아
젖먹이고 씻겨 키우면서
손잡고 유치원 가면서
'나도 엄마처럼 커서 여자 될래'
귀여운 아이의 엄마로 살았으면 좋겠다
새벽이면 일어나 콧노래 부르며
아침을 차리고 손수건도 챙기는
바쁜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봄날이면
하얀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도 신어야겠지
구두는 무슨 색깔이면 좋을까
그이랑 함께 야유회도 갈 수 있을 텐데
오늘 밤 꿈속에선 그이를 만났으면 좋겠다
(김옥진·시인)
+ 꿈꾸는 병(病)
소녀는 질병을 앓았다.
기울어진 햇빛 속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사熱砂의 지평地平을 달리는
한 마리 사자獅子,
소녀는 사랑을 꿈꾸었다.
잠 못 드는 밤엔
세계의 끝에서 숨쉬는
에프엠을 듣고
병든 지구에 내리는 빗물처럼
울 줄도 알았다.
러브스토리를 읽으며
인생과 예술이 술잔 속에서
페시미즘에 젖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 사자獅子가 낮잠을 자는
아프리카 해안의 부서지는
푸른 파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다만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이 지상에 잠드는 것인가를
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
사람들이 각기 등불을 켜 들 때도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으로, 꿈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오세영·시인, 1942-)
+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오백 날쯤
살아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히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향기가 악취 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 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내게 하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神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박라연·시인, 1951-)
+ 얼굴
어제는
수정 같이 맑은 물 흐르는
강가를 걸었어요
밝은 햇살 아래
물빛 원을 그리며 춤추는 조약돌은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희고 동그란 바위에 앉아
빨간 단풍이 병풍처럼 그려진
계곡을 바라도 보았지요
저 멀리서
물위를 걸으며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어요
걷다가 걷다가 멈추어서니
아버지는 사라지고
짙은 어둠만 시야를 가렸어요
아~ 꿈이었어요
너무 아쉬워 다시 눈감았지요
이 밤 한없이 꿈길을 거닐고 싶어
(탁정순·시인,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