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척한 굴속에 갇혀
평생 누워지내려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리하여 바깥일까지 참견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침묵훈련을 시켜야 한다
까딱하면 묘혈을 파는
간사하기 그지없는 것이라서
(권오범·시인)
+ 똑똑한 혀
한평생 한솥밥 먹고 살았건만
갈수록 멍청해지는 머리에 비해
뇌도 없는 것이
어찌나 약삭빠른지
눈은커녕 귀마저 없이
척척한 굴속에 누워 빈둥대다가도
무엇이 들어오면 금방 알아
기억력 하나 귀신같은 너
요건 쌀밥 요건 보리밥 요건 소주 요건 막걸리
갓김치와 씀바귀나물이 함께 들어가도
맛을 하나하나 분리해보고 알았으니 즐겁게 통과
그러다 뉘나 머리카락이라도 만나면 기겁하는 여린 것
평생 입술과 동업이지만, 말 만드는 기술은 더 기막혀
오만가지 소리 잘 낳으려고 적당히 몸 폈다 오그렸다
입천장에 무시로 알아서 붙었다 떨어졌다
좌우지간 너 때문에 내가 삶에 대한 맛을 알아
(권오범·시인)
+ 혀
혀는 부드럽다
직설을 좋아하는 혀
혀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
혀로 기만하고 돌아서서
낼름 내미는 카멜레온의 혀들
눈뜨면 혀부터 다듬고
혀에 입힐 옷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들
전쟁을 일으키는 혀
비수가 되고 총알이 되어
혀로 망하는 숭고한 사상
평생을 못된 것 핥아도
불행하게도 닳지 않는 혀
혀의 중심이 목구멍이 아닌 사람들
혀 짧은소리로만 을러대다가
갈라터진 우리의 입술
(박만식·시인, 전북 익산 출생)
+ 연장론
다 꺼내봤자 세 치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아이 눈에 박힌 티끌 핥아내고
한 남자의 무릎 내 앞에 꿇게 만들고
마음 떠난 애인의 뒤통수에 직사포가 되어 박히던,
이렇게 탄력적인 연장이 있던가
어느 강의실, 이것 내두른 대가로 오만 원 받아들고 나오면서
궁한 내 삶을 먹여 살리는
이 연장의 탄성에 쩝! 입맛을 다신다
맛이란 맛은 다 찍어 올리고
이것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덕분에 내 몸 거둬 먹고살고 있다면
이처럼 믿을만한 연장도 없다
궁지에 몰릴 때 이 연장의 뿌리 舌舌舌 오그라들고
세상 살맛 잃을 때 이 연장 바닥이 까끌까끌해지고
병에서 회복될 때 가장 먼저 이 끝으로 신호가 오는
예민한 이 연장,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사마천은 이것 함부로 놀려서 궁형의 치욕을
한비자는 민첩하게 사용 못한 죄로 사약받고 죽었다는데
잘못 사용하면 남이 아니라
내게 먼저 화근이 되는
가장 비싸면서 가장 싼
천년만년 녹슬지 않는
붉은 근육질의 저!
(김나영·시인, 경북 영천 출생)
+ 불타는 혀
뿌리로부터 끌어올리던
허다한 낱말들
하나 둘 단식에 든 지 열흘
허욕의 이목구비 다 틀어막고
허리 꼿꼿이 서서
먼 눈빛
마음의 무게를 줄이며
가볍게, 가볍게
뜨는 몸
몸이 흔들릴 때마다
하늘하늘 내려앉는
금빛 나비떼
바싹바싹 몸은 여위고
가뭄 속 황토밭처럼
점점 붉게 타는 혀
스스로 제 혓바닥을 다 태워
말을 버리니
마침내 알몸으로 홀홀 떠오르는
가을 나무
(홍일표·시인, 1958-)
+ 붉은 혀
몸은 태우고
어둠 속에 살아남은
붉은 혀.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제 입술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는,
죽지 않고
끝내 죽을 수 없는,
저 광기(狂氣), 타오르는 불꽃
네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
(이수익·시인, 1942-)
+ 혀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고?
말씀은 정체를 감추는 갑옷
세상은 온통 가면무도
모든 혀는 허위虛僞의 창槍
우리들 내면의 진실은 항상 언어의 뒤에 숨는다.
싫어하지만 좋아하는 척 말하기도 하고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척 말하기도 한다.
진실을 말하는 자는 오직 천진한 아이와 천치뿐이다.
우리는 매일 언어의 창으로 이웃을 도륙하고 있다.
(임보·시인, 1940-)
+ 혀 닦기
이 닦기와 입 닦기의 차이는
단지 이와 입 차이밖에는 없다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 닦기는 하루에 세 번
식후 3분 이내, 3분간 하는
구강외과 영역이고
입 닦기는 하고서도 안한 척하는
윤리도덕 영역이었다
허나 한세상 평안하게 살기 위해선
이 닦기와 입 닦기를 모두 잘해야 한다며
밥숟갈 놓기 무섭게 아내는
개 쫓듯 화장실로 나를 몰아내었고
(심지어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있는 척도, 아는 척도, 행한 척도 하지 말고
그저 입 싹싹 닦고 사는 게 최고라며
출근할 때면 으레 닦달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제부터라도 나는
혀 닦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도 세 치 혀를 날름거리며
얼마나 많은 허위와 가식의 죄를 범했던가
때론 과장의 말로 자신을 변호하거나
잘못을 얼버무리고 또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듯 표정까지 덧붙이면서
혀를 잘라내고는 살 수가 없다면
밤마다 내 죄악의 뿌리는
내 몸을 덮고
내 식솔들의 가슴을 덮고
내 작은 아파트를 덮고
내 직장을 덮고 아아,
그 엄청난 죄는 마침내 세상을 덮으리니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정치인들도 많지만)
차라리 아무 말 않고
주검처럼 엎어져 사는 것이
무시로 해야 하는 혀 닦기보다는
훨씬 편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우리 집 가훈은 지금부터 침묵이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양승준·시인, 1956-)
+ 입 안의 혀
나는 만두 속의 쏘가 되지 못하면서
세탁소의 물뿌리개가 되지 못하면서
보세요
그림 속의 양이나
목욕하는 裸婦가 되지 못하면서
내 말 속에 들어오라고
내 말을 이해하라고
얼마나 불가능한 소망입니까
시인들은
당신이 내 입 안의 혀가 되지 못하듯이
나는 세상 밖에서 늘
외마디 소리로 남습니다
아아,
(김영천·시인, 1948-)
+ 詩를 쓰려거든 세 치 혀를 자르라
반계리 은행나무는
천년, 태고의 숨을 몰아쉬며
꼭 다문 입의 혀를 자르고 있었다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있었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천 년 세월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언제라도 떨어져 나갈 듯한 두꺼운 껍질은
천 년 세월을 비집고 들어간 발자욱처럼
내 詩의 벌집같이 꿀을 담아 두고 있었다
(詩 스승이 없는 내가 반계리 은행나무를 마음속에 詩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님이 주시는 은행 알 하나 문질러 까먹는데, 똥 냄새뿐이다 이게 무슨 숙제일까 몇 년을 생각하다가 겨우 생각이 미치는데, 똥 냄새인지 스승의 숙제인지 구분 못하는 놈이 무슨 시를 쓰겠는가 당장 세 치 혀부터 잘라버려야 할 것 같다 세상 단맛 쓴맛 다 보고, 들을 것 볼 것 다 듣고 보고 무슨 제왕이 되어 詩를 쓰겠느냐는 꾸지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옳다 옳다 반계리
은행나무 詩의 스승께서
詩를 쓰려면 세 치 혀를 자르고
천 년 만년 읽을 수 있는
지문 같은 詩를 쓰라 한다
(임영석·시인,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