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맥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맥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곽재구·시인, 1954-)
+ 순간의 평화
잔뜩 부푼 풍선이 아이의 손에 들려온다
육이오 전쟁을 치른
퇴역한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원을 평화롭게 넘실거린다
아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어미뿐이다
아이의 아비는 보이지 않는다
넘실거리던 아이의 풍선이 비행기 날개에 걸려
흔적도 없이 터져 산산이 흩어진다
아이는 운다
공원에 봄꽃이 만발해 있지만
비둘기 떼가 아이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만
어미가 아이를 달래고 있지만
아이는 운다
비행기를 몰고 전쟁을 치르느라
아이 곁을 떠났던 아비
풍선을 만들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 서러운 아이의 울음을
당장 그치게 할 수 있는 그 부푼 풍선을,
(정세훈·시인, 1955-)
+ 무기의 의미·1
빼지 않은 칼은
빼어 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 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 든 칼은
이 어두운 밤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 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김현승·시인, 1913-1975)
+ 부드러운 칼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정호승·시인, 1950-)
+ 평화와 전쟁
따사로운 봄날 아침
꽃들은 다투어 뽐내며 피어나고
마을은 이토록 조용하고 평화로운데
저 전장戰場의 봄은
모래폭풍 세차게 불어대고
먹구름 하늘을 가린 채
포성과 비명으로 얼룩지고 있으리
이름 모를 새들 즐거이 노래하고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저 이라크의 하늘 아랜
새들도 집을 잃고 방황하며
무고한 백성들
지금도 생사의 기로에 떨고 있으리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평화를 주세요
촛불 하나 밝히며
소원을 빕니다.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평화를 주세요
이 땅에
이라크에
온 우주에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당신의 평화를 주세요
(박분도·시인)
+ 어린이에게 평화를!
아프가니스탄의
어두운 하늘아래
포탄은 비 오듯 쏟아지고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길가에 쓰러져있다.
파키스탄의
메마른 땅위에도
총탄은 콩 튀듯 하고
들꽃을 손에 쥔 어린 소녀가
피를 흘린 채 죽어있다.
아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하고
아이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걸 보게 하고
아이들에게서
꿈과 희망
순수를 빼앗아간 전쟁!
정부군과 반군이 손에 손을 잡고
화해를 해달라고
호소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이 한없이 부끄럽구나.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푸른 별인데
사람들은 왜 땅위에 선을 긋고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가
주님은 어디로 가고
알라신은 어디로 가고
부처님은 어디로 가고 없는가
인간이 인간의 가슴에
총을 쏘는 일을 언제까지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유응교·건축가 시인)
+ 나의 편지
반대하라
지금 사막은 잠들지 못한다.
지금 메소포타미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진 울음도 나누지 못하고 죽어간다.
기원전 유적은 동트면 또 잿더미
지금 지구는 야만의 행성이 되어버렸다.
오직 토마호크만이
스텔스만이
모도의 세습침략만이 있고
다른 것은 없다.
반대하라
반대하라
우리들이 세운 기둥마다 새겼던 말
정의와 자유
해방
세계평화
기어이 찾아야 할 그 말들을 도둑 맞았다.
아 오늘의 이라크는 내일의 어디인가.
(고은·시인, 1933-)
+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 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들을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김선우·시인, 1970-)
+ 평화나누기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박노해·시인,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