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에 관한 시 모음> 박성룡의 '풀잎' 외 +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성룡·시인, 1932-2002) + 풀잎 나는 풀잎을 사랑한다. 뿌리까지 뽑으려는 바람의 기세에도 눈썹 치켜올리는 그 서릿발같은 마음 하나로 참고 버티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빗물에 휩쓸려간 자국도 푸르게 메워내고 겨울에 얼어죽는 부분도 입김을 불어넣고 뺨을 비벼주어 다시 푸르게 살려내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아침이면 이슬을 뿜어 올려 그 이슬 속을 새소리 왁자하게 밀려나오게 하고 착하디착한 햇빛을 받으러 하늘로 올려보는 조그만 손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가만히 허리를 일으켜 세워주면 날아가고 싶어 날아가고 싶어 바람에 온 몸을 문질러 보는 초록빛 새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이준관·시인, 1949-) + 풀잎은 풀잎은 씨앗이 모진 추위를 견디라고 딱딱한 껍질을 덮어 주지만 봄이 오면 새싹이 될 씨눈 하나를 씨앗 속에 몰래 감추어둔다. 풀잎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작고 부드러운 것만이 딱딱한 땅을 헤치고 올라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공재동·시인, 1949-) + 풀잎이 아름다운 이유 풀잎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바람의 향기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람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풀잎은 바람의 향기를 사랑할 뿐 절대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풀잎이 아름다운 것은 바람의 향기를 사랑하고도 그 바람에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무화·시인) + 예쁘게 살아가는 풀잎이 되어요 우리 아름답게 일어서는 풀잎이 되어요 바람찬 날 강 언덕 아래 웅크려 세월의 모가지 바람 앞에 내밀고 서럽게 울다가도 때로는 강물 소리 듣고 모질게 일어서는 풀잎이 되어요 누가 우리들 허리 꼭꼭 밟고 가도 넘어진 김에 한 번 더 서럽게 껴안고 일어서는 아니면 내 한 몸 꺾어 겨울의 양식 되었다가 다시 새 봄에 푸른 칼날로 서는 우리 예쁘게 살아가는 풀잎이 되어요 (공광규·시인, 1960-) + 셋방살이 풀잎이 전세를 놓았다 풀벌레가 전세를 얻었다 풀잎은 전세 값으로 노래를 받아 날마다 기뻤다 풀벌레는 전세 값으로 노래를 주어 날마다 즐거웠다. (정갑숙·아동문학가, 1963-) +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이승훈·시인, 1942-) + 비에 젖은 풀잎을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나태주·시인, 1945-) +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내가 풀잎으로 서서 별을 쳐다본다면 밤하늘 별들은 어떻게 빛날까. 내가 나무로 서서 구름을 본다면 구름은 또 어떻게 빛날까. 내가 다시 풀잎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 다시 나무로 서서 나를 본다면 나는 진정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걸어갈까. 내가 별을 쳐다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풀잎들도 별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나무도 나를 보고 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풀잎 나직이 부르는 노래가 진정 노래예요 거센 함성 없지만 끊어질 듯 살아오는 그 끈질긴 힘의 목소리예요 빛이예요 온 천하가 어둠에 갇혀 방향 없이 바람에 밀려도 눈물로 일어서는 소리 우리 긴 기다림의 서러움이 진정 새로움의 노래예요 (김종우·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