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통에 누워 있는
녹슬고 쓸모 없던
작은 못 하나
바로 세워 벽에 박았더니
내 키만한 거울을
든든하게 잡고 있네
저렇게
작은 것들도
엄청난 힘이 있구나
누군가가 바로 세워 주기만 하면
(고광근·시인, 1963-)
+ 구부러진 못
정신 바짝 차리며 살라고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지면서
못은 그만 수직의 힘을 버린다
왜 딴생각하며 살았냐고
원망하듯 못이 구부러진다
나는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살아보자고 세상에 박히다
다들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망치를 돌려 구부러진 못을 편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일어서지 않으려 고개를 들지 않는 못
아니다, 아니다, 그래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정신을 놓을 때도 있지 않겠냐고
겨우 일으켜 세운 못대가리를 다시 내려친다
그래, 삶은 잘못 때린 불꽃처럼
짧구나, 너무 짧구나
가까스로 세상을 붙들고
잘못 때리면 아직도 불꽃을 토해낼 것 같은
구부러져 녹슬어가는 못.
(전남진·시인, 1967-)
+ 못을 박다가
메밀꽃 핀 그림 액자 하나 걸으려고
안방 콘크리트 벽에 박는 못
구멍만 만들고 풍경은 고정시키지 못한다
순간, 그 구멍에서 본다
제 몸의 상처 포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벽
견디지 못하고 끝내는 떨어져 나온
조각들
벽, 날카로운 못 끝을 생살로 감싸 안아야
못, 비로소 올곧게 서는 것을
망치질 박힘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나
부스러지려는 자신을 악물고
기꺼이 벽으로 버티며 견디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 향해 몇 번이나
못질했던가
꾸부러지지 않고 튕겨나가지 않고
작은 풍경화 한 점 고정시키며
더불어 벽으로 살기까지
(신현복·시인, 1958-)
+ 못
내 젊은 시절 한 짓은
못을 박는 일이었네
한 여인의 연약한 심장에
매일 구멍을 뚫었네
청춘도 사랑도 다 잃고
가난과 싸우던 가련한 여인
청맹과니 한 아들에게
이 세상의 문을 열어준 대가로
그녀는 천 개의 못에 박혀
드디어 가라앉고 말았네
(임보·시인, 1940-)
+ 못
내 안에서 피는 가시 하나
강물 깊은 어머니 가슴에
못으로 박히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실못 대못 소나기 내리듯 꽂힐 때
포말지어 밀려오는 파동으로
피울음 멍울꽃 피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내 안에서 뜨는 샛별 하나
어머니 가슴 데우는 화롯불 되어
박힌 못 사그라지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혜성처럼 떠올라 밤하늘 빛낼 때
못 진 자리 은하수 꽃무리 되어
찬란한 보석꽃 피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김윤자·시인, 1953-)
+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시인, 1966-)
+ 붉고 푸른 못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 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
별은
하늘에 박힌 가장 아름다운 못,
뿌리도 없는 것이
몇 억 광년 동안 빛의 눈물을 뿌려댄다
빛의 가장 예민한 힘으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지구를 돌린다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런 못,
튼튼하게 뿌리내리지도
아름답게 반짝이지도 못해
붉고 푸르게 녹슬고 있다
소독할 생각도
파상풍 예방접종도 받지 않은 그대, 의
붉고 푸른 못
(유용주·시인, 1960-)
+ 못
한시도 돌보아주지 않으면
세상살이 감당 못하리라
생각되었던 아내가
콘크리트못질을 하였습니다.
내가 미처 손 못 댄
방안의 액자걸이며
부엌의 냄비걸이를
적재적소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모처럼 쉬는 날
보름만에 군포 공장에서 돌아와
방벽에 부엌벽에 꼭꼭 박힌 못들을
이리잡고 저리잡고 흔들어 보자니
지금쯤 공장에서
망치질을 하고있을 아내 모습이
콘크리트 못이 되어
내 가슴 속 깊숙이 박혀옵니다.
(정세훈·시인, 1955-)
+ 못 박는 아버지
전쟁과 혁명을 좋아하던 아버지
군복을 벗자 떠돌이 도편수가 되었다
생생한 못 하나면 전국 지도에 방점 찍던 아버지
이제는 고충아파트 벽에 걸린 액자 속에 산다
그래도 한시절 떠돌이 도편수로 이름을 날렸는지
주막집 여자에게 돈만 떼이고 나를 얻은 아버지
그 뜯어내기 어려운 生들은 못질하고 대패질하시는지
액자 속에서 더 노랗게 늙어버렸다
남의 가슴에 못질하던 니 가슴에도 못이 박히는 거여
대낮에도 액자 속에서 잔못질처럼 중얼거리는 아버지,
반평생 남짓은 못질로만 살았을 것인데,
그래도 무슨 못이 그리 남은 것인지
당신 손으로 꽝꽝 박은 棺 속으로 떠나던 아버지,
꽃상여 메고 가는 아들딸들도
다 다른 구멍에 박아서
자식끼리도, 가슴에 대못을 박게 하던 아버지,
이제는 못 박힌 액자 속을 떠나시는지
벽에 걸린 헐거운 못이 떨어졌다
(송유자·시인, 1955-)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 못과 망치
너의 정수리 치기 위해
마침맞은 자세로 태어난 나
너는 맞아야 하고
나는 때려야 한다
전생이 철천지원수였는지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랴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싸워야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녹슬도록 자다가도
이렇게 함께 호명되는 날은
주인 눈대중이 만족할 때까지
나는 무턱대고 너를 때릴 수밖에 없다
삐딱하거나 구부러지면
내 이빨로 널 뽑아버려야 하니까
기왕이면 정직하게 맞아다오
자, 칠 테니 목에 힘줘라
탕탕 탕 탕 탕 탕
그만 됐다
저 액자 네가 책임져야할 것 같다
아, 널 때린 나도 머리가 띵하다
(권오범·시인)
+ 본능
핸드백을 뒤지다가 못에 찔렸다
언젠가 육교를 오르다 마주친 못은
가방 속에서 손가락을 겨냥하고 있었다
못의 본능은 찌르는 것, 어딘가 박혀야한다
파고들어 하나가 돼야한다
내 발바닥은 오래 전에 빠져나간
못 하나를 기억한다
널빤지에 박힌 대못이 달리는 맨발을 찔렀다
쇳독이 종아리까지 기어올라
할머니는 생솔을 꺾어 화로에 연기를 피웠다
어린 나는 젖은 연기에 발을 쬐며 진저리쳤다
못구멍을 타고 저릿저릿,
매운 솔잎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잠깐, 못이 박혔다 나갔을 뿐인데
그 구멍 하나를 참지 못해
나는 몸이 시키는 대로 한참을 앓았다
녹슨 못을 꺼내 들여다본다
어디서 흘러왔을까
망치에 몇 번이나 맞았는지 못대가리가 헐었다
제 머리통을 순순히 내주는 것, 역시 못의 본능이다
못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목수인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마경덕·시인,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