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비판 시 모음> 배한봉의 '문명의 식욕' 외 + 문명의 식욕 옷의 식욕은 왕성하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세다 나는 옷의 배를 불리는 양식이다 양말을 신자, 발이 사라진다, 양말이, 발을 먹었다 왼쪽 다리를 먹은 바지가 오른쪽 다리를 밀어 넣으니 오른쪽 다리마저 먹어버린다 왼팔을 넣으면 왼팔을, 오른팔을 넣으면 오른팔을 먹는 재킷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재킷 나는 이제 어깨도 가슴도 없다 나는 이제 한 벌의 옷이다! 거리에 사람을 갖춰 입은 옷들이 둥둥 걸어 다닌다 숫제 개나 고양이를 갖춰 입은 옷도 있다 아침부터 왕성하게 나를 먹어치운 옷은 저녁이면 나를 생산한다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 (배한봉·시인, 1962-) + 지구의 눈물 둥근 것들은 눈물이 많다, 눈물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칼로 수박을 쪼개다 수박의 눈물을 만난다 어제는 혀에 닿는 과육 맛에만 취해 수밀도를 먹으면서 몰랐지 사과 배 포도알까지 둥근 몸은 모두 달고 깊은 눈물왕국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눈물왕국을 사랑하는 사람 입맛 없을 때마다 그 왕국에 간다 사람 몸 저 깊은 곳 생명의 강이 되는 눈물, 그리하여 사람 몸도 눈물왕국 되게 하는 눈물, 그렇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둥근 것만 보면 깎거나 쪼개고 싶어한다 지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숲을 깎고 땅을 쪼개 날마다 눈물을 뽑아 먹는다 번성하는 문명의 단맛에 취해 드디어는 북극의 눈물까지 먹는다 (배한봉·시인, 1962-) + 세워지는 모든 것들은 무너진다 성수대교가 동강나고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을 때 세상 사람들은 분노했다 세상 천지에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러나 사람들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다 이 지상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신이 만든 산과 바다도 때가 되면 무너지고 기울거늘 인간들이 쌓은 저 보잘것없는 모래성 그것이 완전키를 믿다니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몇 대를 공들여 이룬 제왕(帝王)의 궁성(宮城)도 언젠가는 가라앉고 몇 백년 정성으로 세운 신전(神殿)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더러는 산의 허리를 자르기도 하고 더러는 대지의 심장을 뚫기도 하는 하늘을 거역하는 교만한 인간들아 헛되이 모래의 성들을 쌓지 말며 흐르는 강물을 막아 둑을 세우지 말라 너희가 만든 것들은 결국 쓰레기들일 뿐 쓰레기의 더미 속에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눈 먼 인간들아 쓰레기의 세상에서 쓰레기가 아니기 위해 쓰레기를 헤치고 일어서라 어리석은 망치와 끌을 내던지고 벗은 몸으로 바보로 한 마리 순한 짐승으로 어머니 자연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라 모든 세워지는 것들은 언젠가 주저앉는다. (임보·시인, 1940-) + 자연과 문명 잠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라일락이 피는 듯 어느새 아카시아꽃 그리고 밤꽃냄새가 진동을 쳤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었고 그래서 올해도 어김없이 감꽃이 할머님의 무덤가로 떨어져 내리고 바위 틈새의 개복숭아나무가 질긴 열매를 맺어 내리라 인간사에도 무심한 눈이 내렸다 어제 같은 새파란 목숨에 연꽃처럼 청순한 죽음이 암갈색 바위 끝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훗날 역사가의 긴 보고서에는 우리들 중 아무 이름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어떠한 것에도 관심하지 않는 문명처럼 (윤고영·시인) + 깊은 흙 흙길이었을 때 언덕길은 깊고 깊었다 포장을 하고 난 뒤 그 길에서는 깊음이 사라졌다 숲의 정령들도 사라졌다 깊은 흙 얄팍한 아스팔트 짐승스런 편리 사람다운 불편 깊은 자연 얇은 운명 (정현종·시인, 1939-) + 수심(獸心) 여름 길바닥에 뱀이 치여 쥐포가 되어 있다 여름 길바닥에 개구리들이 치여 덕지덕지 껌 딱지가 되어 있다 가을 중앙고속도로에 고라니가 치여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다 나는 많이 서러웠다 내장이 터지듯 서러웠다 천지에 내장 있는 것들이 모두 서러웠다 (박용하·시인, 충북 영동 출생) + 채식주의자 집이라고는 평생 가져본 적 없다고 노숙의 그가 가진 도시락은 들녘이고 산자락이었다 그래서 그의 밥에는 냉이와 쑥과 시금치가 담겨있고 반찬은 부추와 상추와 쑥갓으로 가득했다 육신을 얻었기에 살과 뼈를 가진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새들도 물고기도 모두 친구처럼 지낸다고 했다 제 철 도시락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겨울 어떤 날 하루는 푸릇푸릇한 오이만 먹었고 붉은 당근만 먹었고 호박도 양파도 즐겨 먹었다고 그래서 마침내 그의 몸에서 언젠가는 싱싱한 채소가 자랄 것이라고 빙그레 웃는 저 채식주의자가 늘 봄날 같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썩는 여자 그녀는 지하생활자가 되어간다 지하철을 타고 지하상가의 많은 물건들을 방에다 가득 채우는 그녀의 머리에 끈끈한 음지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그녀는 지하생활자가 되어간다 습기와 시멘트 냄새, 하수구의 악취, 그녀의 살가죽은 눅눅하고 퀴퀴하게 속으로부터 썩으며 곪고 있지만 아직 구멍이 난 것은 아니다 새끼들을 치고 부엌에 나타나 뻘뻘거리는 쥐며느리, 바퀴벌레, 그리마 축축한 벽지를 들고일어나는 곰팡이와 그녀의 싸움은 결국 곰팡이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밤이면 관 속에 누워 있는 여자, 천장 위에 이사온 사람들이 못질하는 소리, 그녀는 조금씩 시체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발가락들은 헐어 진물을 흘리고 화장품은 더 이상 그녀의 주름살을 덮어주지 않는다 때때로 그녀도 책을 읽는다 늙은 학자의 흰 수염처럼 하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책을 그러나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중얼대다 잠든다 컴컴한 문명 속의 이 문둥이 여자를 그 어디 햇볕 좋은 땅 위로 데려가 그녀의 머리에 끈끈하게 거머리처럼 자라난 음지식물들을 말려 죽여야 할까 (최승호·시인, 1954-) + 성공시대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문정희·시인, 1947-) + 쓸쓸한 기계 어머니 풀밭에 버려져 있다. 어둠이 와도 작동되지 않는 어머니, 엔진이 올라붙은 어머니, 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 한 어머니, 아무도 찾지 않는 어머니, 풀이 서걱거릴 때마다 기억의 뿌리가 흔들려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는 어머니, 어머니 풀밭에 버려져 있다. 대량 생산의 틈바구니에서 과열되던, 과부하가 걸렸던 어머니, 노을이 밀려들면 한창때 만들어낸 눈물이며 사랑이며 그리움을 떠올리며, 어머니 저기 버려져 있다. 모터가 타버려 수리되지 않는 어머니, 한낮이 머물다간 자리가 벌건 녹으로 번진다는 어머니, 기름칠 제대로 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 저기 혼자 버려져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버려져 있다. (김왕노·시인, 경북 포항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