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시 모음> 김추인의 '달팽이의 말씀' 외 + 달팽이의 말씀 그의 문체는 반짝인다 은빛이다 또 한 계절 생을 건너가며 발바닥으로 쓴 단 한 줄의 정직한 문장 '나 여기 가고 있다' (김추인·시인, 1947-) + 달팽이에게 크면 나쁘고 작으면 좋은 것들이 있다 세상엔 가령 네 집이 그래 너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높은 집을 꿈꾸지만 세상에서 제일 크고 높은 집을 네가 가져봐 이쪽 배추에서 저쪽 돌미나리로 이사도 못 가고 홀로 죽을 때 누가 있어 허물어지는 네 집의 서까래들을 붙들어 주겠니 (박범신·소설가, 1946-) + 달팽이네 네 지나온 길 위의 길고 긴 눈물자국. 이제는 반짝반짝 은빛 발자국 (차영미·시인) + 달팽이 집 달팽이는 날 때부터 집 한 채씩 지고 왔으니, 월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전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집 평수도 절로 커지니, 아사 갈 일 없어 좋겠습니다! 사고팔 일 없어 좋겠습니다! 뼛속까지 얼어드는 엄동설한에, 쫓겨날 일 없어 좋겠습니다! 불 지를 놈 없어 좋겠습니다! (김환영·극작가이며 삽화가, 1959-) + 달팽이 이슬비 그친 뒤 양재천에 가서 달리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달팽이를 밟아버렸다 내 발에 밟힐 때 온몸이 으깨어지면서 달팽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나는 달팽이한테 너무 너무 미안해서 자정이 넘도록 기어나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기어나오는 달팽이들을 일일이 손으로 집어 수풀 속으로 던져주었다 (정호승·시인, 1950-) + 달팽이 한여름, 찐득이는 아스팔트 위를 타이어 검은 조각 온몸에 감고 배밀이를 하고 있구나 세상의 얽힌 덤불 속에서 더듬이로 더듬거려도 목을 길게 늘여보아도 길은 안 보이고 안 보이는 네 길은 아득하구나 거대한 도시 소음에 떠밀리면서 단단한 껍질 속에서 몸을 궁글려 태아처럼 웅크리고 아 굴욕의 길을 가고 있구나 입 벌린 바구니로 굴러 떨어지는 백동전 몇 개 삶의 바다, 찐득이는 아스팔트 위를 타이어 검은 조각이 다 해지도록 배밀이를 하고 있구나 (박지영·시인) +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김신용·시인, 1945-) + 달팽이의 노래 늘 난 혼자였죠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죠 그 혼자라는 외로움에 아침이 밝아와도 눈을 뜨기 싫었어요 괜스레 울적해진 날은 애써 어색한 웃음 지으며 설움을 삼켰죠 입술 깨물며 울지 않으려 하늘을 보았지만 목이 메어와 눈시울이 붉게 젖어왔죠 보이나요 오늘도 난 도망치지 못할 만큼 무거운 세상을 어깨에 지고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으로 까마득한 벽을 넘고 있어요 때론 절벽을 타고 오르다 발을 헛디뎌 피멍드는 아픔도 참아야 했죠 갖은 고초와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 그 어떤 장애물도 나를 막을 순 없었죠 이 세상 태어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죠 그래요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언젠가는 정상에 올라서서 새처럼 비상하는 날이 올 걸 믿어요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지금은 어둡고 낮은 곳에 머무르지만 나도 언젠가는 강물처럼 계곡과 들판을 지나면서 물줄기가 굵고 넓어져 큰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를 수 있겠죠 눈부신 황금빛 물결의 푸른 바다를 이루어 하늘과 바다가 닿아 하나가 되는 황홀경을 느낄 수 있겠죠 그래요 난 가장 낮고 깊은 곳으로 흘러가면 풍진 세상을 벗어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를 것임을 믿어요 (김용식·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