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에 관한 시 모음> 김시종의 '홍수' 외 + 홍수 홍수에 집단 항의하여, 수박들이 할복(割腹)을 했다. 시뻘건 내장을 드러내 보이며, 무언의 항변을 절규(絶叫)하고 있다. (김시종·시인, 1942-) + 홍수 밤사이 이 땅은 강이 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들판은 간 곳 없고 江心에 미루나무가 목을 내놓고 구원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집들이 강변에서 허우적거리고 쏟아내는 울분과 외침의 소리가 굽이쳐 저 붉은 물살 위로 떠 흐른다. 저 한 맺힌 강물은 언제쯤 저 슬픈 들판을 빠져 나갈런지 개구리도 두꺼비도 모두 산으로 기어올라가 두꺼운 회색 빛 하늘만 쳐다본다. 이 아침, 저 물의 심판 위에 '노아'가 보인다. (박덕중·시인, 1942-) + 여름 시편·3 -홍수 포효하는 붉은 짐승 떼가 몰려오고 있음. 사냥감의 멱살을 물고 숨통을 죄는 사자들, 헐떡거리고 까무러치는 땀방울들의 신음소리 빗속에서 뿌옇게 들림. 드디어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먹이가 되는 침묵. 붉은 포효가 뒤덮은 세상은 시간과 함께 묻힌 땀방울들의 공동묘지 눈물과 한숨 한 톨 볼 수 없음. 해마다 치산치수를 모르는 치자治者들의 허튼 소리 범람하는 들녘 논어論語와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묻히고 있음. (최진연·시인, 1953-) + 홍수 끈질긴 욕망과 갈증의 아가리 분풀이하듯 비가 내린다 쿨럭이며 수천 개의 마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흙탕물 비로소 강물은 차 오르고 부끄러움으로 벌개진 강의 얼굴 위를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내린다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젖어 초라하다 속이 쓰리다 하지만 이해한다 난 나의 폭음(暴飮)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해하는 편이다. (장승진·시인) + 홍수 물에 잠긴 여의도는 그 자체가 방주(方舟)다. 흔들리는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유리 돛대 아래 비둘기와 꽃잎 대신 국회의사당과 여의도백화점과 방송국이 실려 있다. 익명(匿名)이 방주의 지붕을 덮고 있다. 뉴가 나를 부르나? 홍수에 방향 잃은 뱀처럼 떠내려가는 내 이름 석 자 (주창윤·시인, 1963-) + 洪水 신난다. 한강이 가득하다 龍이라도 춤을 추듯 꿈틀대는 흙탕물이 너무 신난다 水位 11.25M라고 TV마다 야단이다 고수부지 천막이, 스티로폼이 흐른다 보기 싫은 정치꾼 몇 놈 떠내려갔으면 더 신나겠다 스모그에 가렸던 북한산엔 빛을 내는 초록, 이슬 먹고 오늘밤에는 은하수도 보이겠다 창 들고 활 메고 사냥 다니면 더 좋겠다 어정하게 비는 그칠 테지 올림픽대로 드러나면 또다시 어두워질 서울의 하늘 떠내려갔으면 싶은 정치꾼 여전히 살아 남아 TV에 얼굴 내밀고 수재 의연금 내며 유들유들 웃겠지 (이길원·시인, 1945-) * 1990. 9. 11. 한강 수위가 2번째로 높다던 날 강변에서. + 다시 한 번 홍수를 - 기도 다시 한 번 홍수를 주시옵소서 모두들 약삭빠르게 말라버린 광대뼈며 갈비뼈며 가뭄 때문에 오르는 쌀값을 흠씬 적셔 둥둥 떠내려가게 하옵소서 멸할 수밖에 없더라도, 죽어버리더라도 불을 주옵소서 모두 냉기 서린 눈동자하며 손목 하나 만져도 지금은 왠지 36도 아래서 익은 체온들 춥지 않게 하옵소서 활활 타게 하옵소서 아니면 사랑을 정말이지 사랑을 주옵소서 지아비가 지어미에게 어미가 새끼에게만 말고 늘상 길거리에서들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향아·시인, 193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