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에 관한 시 모음> 이해인의 '우산이 되어' 외
+ 우산이 되어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밖에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우산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가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도종환·시인, 1954-)
+ 그대의 우산
비를 맞는
사람에게 살며시 다가가
우산을 씌워준다
누군가에게
우산이 되어 준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
나도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해
몸도 마음도 젖지 않게 해주는
다정한 우산이 되고 싶다.
(이문조·시인)
+ 젖은 우산
지난 장마철, 빗물에 젖은 우산을
무심코 계속 습기 찬 곳에
접혀진 채로 팽개쳐 두었더니
어느샌가 우산대에
발갛게 녹이 슬어버렸습니다.
비가 오면
나를 씌운 우산이 빗물에 흠뻑 젖듯이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도
무작정 아픔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나로 하여 지금 이 시간
혹 누군가의 마음도
장마철의 우산처럼
젖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때론 혹 그대 마음도 나로 하여
젖게 된다면, 그 마음
뙤약볕에 이불 펴 널듯
푸른 하늘을 향해 활짝 펴고서
어서 말릴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안재동·시인, 1958-)
+ 우기(雨期)에는 사람이 없다
비가 쏟아지자
자작나무 숲이 젖고
그 우듬지 위 까치집이 젖고
벌거숭이 어린 까치가 젖는다
젖어 실룩거리던 강물도
그예 주체할 수없이 꿈틀대다
이내 아우성친다
모든 것들 비에 젖어들 때
사람들은 반동적으로 우산을 펼쳐든다
빗방울을 밖으로 퉁겨버리던 우산
우산은 즉각 사람들도 퉁겨버린다
금세 거리는 우산들로 우글거린다
우산이 달리는 택시를 잡기도 하고
벼린 뿔 곧추세운 채
한 우산이 다른 우산을 치받기도 한다
모든 것들 젖는 우기엔 사람이 없다
사람들 있던 자리엔
난폭한 동물만 득실거린다
(이기홍·시인)
+ 우산도 없이
나무도 비를 맞고
말없이 서서 있는데
풀꽃도 비를 맞으며
꽃잎꽃잎 하늘거리는데
유독 사람만이
우산을 쓰고 빗속을
서둘러 간다
유독 사람만이
부끄럽고 서러운 일도 많아
하늘 아래 또 다른
지붕 있어 그리 숨는다
아, 한 번쯤은 우산도 없이
비 오는 날의 나무가
되어 볼 일입니다
내가 바로 젖은 우산이
되어 볼 일입니다
(홍수희·시인)
+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나희덕·시인, 1966-)
+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함민복·시인, 1962-)
+ 박쥐우산을 쓰고
내 마음의 동굴 속에 사는 박쥐야
거꾸로 매달려 있는 박쥐야
고독한 박쥐야
까만 종유석 같이 빛나는 박쥐야
나는 네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없다
다만 우산으로는 만들어 줄 수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너를 공손히 내려
우산으로라도 좋다면
비는 내리고
너를 활짝 펼치고 하염없이 걷겠다.
(신현정·시인, 1948-)
+ 작은 우산
그녀와 나는 산에 봄놀이 갔었는데
갑자기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니
그녀는 다행히 우산을 펼쳐들었지만
손바닥만 한 휴대용 작은 우산이라
우리는 사정없는 찬 꽃샘바람에
그만 바지저고리 흠뻑 젖고 말았네
차라리 내가 그에게 사양했더라면
그녀의 고운 옷만은 젖지 않았으련만
나는 염치없이 우산을 내가 받아들었네
작은 우산 비를 못 막은들 어떠랴
하늘을 가리고 세상을 막았으니
남몰래 와장창 사랑의 키스 성공했다네
그때 내가 점잖게 양보했더라면
그녀가 비바람이 쫓겨 달아났더라면
아마 지금쯤 그는 나의 아내 아니었으리라
아들딸 낳고 대학가고 아파트 사고
나의 행복은 영영 없었을지도 몰라라
아 지금도 그 작은 우산 간직하고 있다네.
(박유동·시인, 1936-)
+ 우산 꼭지
전철을 타려는데
우산 꼭지 또르르 굴러 레일 위로 달려간다.
주우러 가고 싶은 순간
생명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스치는 대목에서
우산만 만지작거렸다.
진작 보살펴 줄 것을
살짝만 조여줬으면 빠지지 않았을 것을.
그날 이후로 우산은 자꾸 무너진다.
비가 새더니, 살이 녹슬더니, 삐걱이더니
이젠 아예 펴지지도 않는다.
화가 단단히 났나보다.
레일 위로 굴러간
내 삶의 꼭지
다시 찾아 조립할 수만 있다면
우두둑 무너져 내리는
우산과도 같은 내 육신의 반란
달랠 수 있을 텐데
(김윤자·시인, 충남 보령 출생)
+ 물 우산 -새벽기도·1608
빗소리
구워내는 우산을 쓰고 나면
수직의 메시지가 뜨면서
명령이다
젖으라
물 옷 입으라
그리고는
기다려
치마로 젖어들라
가슴이 젖어들라
젖으라 우산 쓰라
하늘서
여기까지 온
수직법을
읽으라
(이영지·시인, 경북 영주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