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과 습관에 관한 시 모음> 정세훈의 '버릇' 외 + 버릇 딱히 언제라고는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간혹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 (정세훈·시인, 1955-) + 세살 버릇 어머니는 나에게 어려서부터 손톱을 물어뜯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의 나는 무슨 일 때문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을까 (원태연·시인, 1971-) + 버릇 손목시계를 차면 외출하신다는 신호. 안 볼 걸, 할아버지는 왜 꼭꼭 챙기실까? 그 버릇 접는 날에는 긴 외출이 되실 거래. (박경용·아동문학가, 1940-) + 잠버릇 그래, 별난 버릇이라고 해도 좋고 우스운 습관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루의 피곤을 침대에 눕히고 밤에 잠을 청하기 직전에 집사람의 오른쪽 힘든 다리를 내 배 위에다 끌어 편안히 얹어놓고 오른팔은 내 가슴 위에 올리게 한 뒤 나의 왼쪽 손으로는 아내의 팔꿈치를 감싸주면서 서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잔다 그래야 다리의 피곤이 풀릴 것 같고 그래야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수십 년간 정반대로 그리했던 것을 지금 수년 사이에 이렇게 해주므로 그 동안 많이 귀찮았을 데도 불평 없이 잘 참아왔던 내자에게 사랑의 빚진 것을 조금씩이나마 갚아가고 있는 중이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아내의 버릇 아내의 말끝에는 "미안해요."라는 말이 항상 붙어 다닌다 언제, 어떻게 해서 이 말버릇이 우리의 고단한 삶 속에 파고 들어와 제일향(第一香)의 노릇을 해 왔는지, 그건 잘 기억되지 않으나 아내의 이 말에 감추어둔 뜻은 백 퍼센트 순도(純度)를 가진 사랑으로, 시집 올 때부터 베개 속에 넣어두고 조금씩 조금씩 꺼내어서 쓰고 있었다 (곽진구·시인, 1956-) + 혼자 생각하는 버릇 - 무당벌레 돈목마을 돼지우리 돌아가다가 무당벌레 만나면 그 날은 운이 좋다 하늘에서 날씨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데 가지나무 잎에 붙어 생각하는 무당벌레 만나면 나도 생각할 것이 생각나서 좋다 둥근 허리에 동글동글한 무늬 색깔 어딜 가나 혼자 있는 버릇 그 혼자가 예뻐서 좋다 (이생진·시인, 1929-) * 돈목마을: 우이도에 있는 조용한 섬마을 + 버릇 물빛 여자를 만나면 입술을 갖고 싶고 귓불이 예쁜 여자를 만나면 가슴을 갖고 싶다 행여 눈물이 많은 여자를 만나면 그녀의 심장에 뜨는 별이 되고 싶다 그러나 도시에는 물빛 여자도 귓불이 예쁜 여자도 눈물이 많은 여자도 없다 진실은 흙으로 돌아가는 날에야 만날 수 있다는데 성급한 마음은 훌훌 옷을 벗어던진다 옷을 벗는 버릇 때문에 번번이 손해를 보면서 산다 (김용언·시인, 1944-) + 슬그머니 들어온 습관 금방 갈 것처럼 내 안으로 들어와 놓고 주인 행세하는 거 금방이라니까요 올 때는 조용히 쓰윽 들어와 놓고 나갈 때는 야단법석 난리 쳐도 안 가요. 어쩔 수 없나요? 그냥 있어야 하나요?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손님, 좀 나가 주시죠? 나, 주인이거든요. (박희순·아동문학가) + 최고의 습관 일 하루 한 번씩 나만의 감상실을 찾아 묵은 마음을 말끔히 털어낸다 십 단 십분이라도 고요를 찾아 나를 찾아보는 여유를 가진다. 백 느낌과 내 생각을 백자 이상 컴퓨터란 친구에게 전해 준다 천 천자 이상 남의 시나 글을 읽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만 하루 만 번 땅바닥에 내 존재를 알리는 발 도장을 찍는다. 습관은 의지로부터 길들여지는 것 (하영순·시인) + 습관성 사랑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기다린다 네가 찾아오던 그 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출근 시간 전 모닝커피의 여유로움을 사랑하던 너를 그리며 눈짐작으로도 두 잔 분량의 물을 꼭 맞추어 커피포트에 올려놓고 어김없이 기다린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비슷한 무늬의 두 개의 잔에 커피 두 스푼 설탕 한 스푼을 넣고 물이 끓기만을 기다린다 증기가 한 줌씩 한 줌씩 살아나 소리내기 시작할 때면 내 그리움도 살아나 귀에 대고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이제 잊을 만도 하지 않냐'고 씁쓸한 미소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재촉하듯 증기는 더 큰 소리로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불을 꺼야 할 시간인데 나는 그냥 멍하니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아차 하며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오늘도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마치 그래야만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처럼 (박성철·시인, 1943-) + 습관이 꿈을 앞지른다 내 꿈의 품사는 동사(動詞) 꿈이 비포장도로를 걷는다. 오늘에 살면서 늘 오늘에서 도망치려하는 습성을 지닌다. 젖은 외투 같은 외로움을 입고 가는 길에 옹기종기 이름 모를 들꽃이 제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 해는 저물고 있는데 축축한 내 꿈의 안식처는 어디 있는가. 다가설 때마다 장난처럼 꼬리를 감추는 꿈의 길목에 설정된 배경처럼 안개는 저 멀리서 스멀거리고 내 종아리는 제자리걸음으로 튼튼해졌지. 안개 속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도박 같은 것. 돌부리에 채어 발목이 부어 오른다. 돌부리보다 뾰족하게 자란 습관이 고개를 쳐든다. (김나영·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