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박남준·시인, 1957-)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되뇌인다
어머니
(박시교·시인, 1947-)
+ 주소록을 다시 만들며
해마다 정월이면
수첩을 사서
주소록을 다시 만든다.
출석을 부르듯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생각한다.
버려지는 이름들
버려지는 주소와 전화번호
새로 올리는 이름들
새로 올리는 주소와 전화번호
누군가도 내 이름을 이렇게 버리고 있겠지
누군가도 내 이름을 이렇게 새로 올리고 있겠지
버려지지 않으려고
갈림길에서 떨고 있던 이름
다시 끼워 넣으면
불씨 한 점 가슴에 안은 듯
내 두툼한 수첩주소록 호주머니가 따뜻해진다.
(전영관·시인)
+ 부르지 않은 이름
이름은 있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불러 주지 않는다고
고개 숙이지 않았습니다.
등 돌리지도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부르지 않아도
자랐고 꽃피웠고
열매 맺었습니다.
이 가을!
부르지 않아도
자기 이름으로 대답하는 삶,
가지마다 열매 맺은 삶들이 아름답습니다.
(정용철·시인)
+ 흙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정희·시인, 1947-)
+ 고마운 일
누가 처음에 그렇게 이름을 불렸을까
돌
모래
풀
이런 고운 이름을 생각해 냈을까
돌,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입 속에서부터 구르기 시작하고
풀,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풀잎 흔들리는 바람이 입술 가득히 인다
누가 써걱거리는 그 느낌에 맞도록
모래를 모래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시인들은 모두
그 이름으로 콩줍기 놀이를 하듯 시를 쓰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김상현·시인, 1947-)
+ 이름을 지운다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허형만·시인, 1945-)
+ 이름 때문에
쥐똥나무 꽃에서는
쥐똥 냄새가 날까?
향수 냄새가 나는데
며느리 밑씻개 잎은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했을까
가시가 돋쳤는데
개불알꽃은 정말
개불알만을 닮았을까?
아름다운 야생난인데
어항 속 이끼 자국처럼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
이름값이란 바로 가슴 떨림이다
잘못된 이름 때문에
진실이 감추어진 어둠이다
(노태웅·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