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다가
날선 흰 종이에 손 벤 날
뒤져봐도
아까징끼 보이지 않는 날
(안도현·시인, 1961-)
+ 소외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고정희·시인, 1948-1991)
+ 소국흘도·무인도의 외로움
외로움을 깨느라 문드러진 주먹
아무도 만져주는 이 없다
노란 나리꽃 혼자 피게 하고
구름은 저만 갈 데가 있는 모양
구름이 저만 가는 것을 보면 더 외롭다
(이생진·시인, 1929-)
+ 외로움을 오래 묵히면
외로움을
오래 묵히면
폭풍처럼 악마가 된다
도막도막 잘라
화병에라도 꽂아두라
봄바람이 불어
뿌리 내리고 잎이 나면
하얗게 목련꽃 필라
사랑이여, 꽃구경 오시라
꽃향기 그윽한
내 방으로 오시라
(김옥진·시인, 1962-)
+ 외로움의 정체에 대하여
밤마다 심장 가르는
끈적이는 서글픈
정체불명의 바람 같은 것
낯선 거리에 휩쓸리는
초라한 추위를 동반하여
늘 무위로 끝나는 방황
불면의 얼굴로 다가와
동공을 비워내고
폐부 깊숙이 통증을 수반하는
너! 그래, 그건
늘 덜 맞는 옷처럼 이질감 주는
외로움 그것이었구나
(고은영·시인, 1956-)
+ 외로움
봄이 이리 더딘가
입춘이 지났는데
얼음장 밑으로
봄 마중 부산한데
아직 찬바람 빈 가슴 휘몰고
한 톨 불씨 같은
그리움까지 얼어버린
아직 겨울 밤
별빛이 외롭다.
(이여진·시인, 전남 해남 출생)
+ 외로움
스산한 바람이
뼛속처럼 숭숭 뚫린 가슴을 파고드는 저녁
창 너머 보름달이 시리게 환하다
절해고도 제주에서
어느새 두 번째 보내는 가을
꽃들은 정들어 친구가 되었지만
사람인데 저들하고만 살 수는 없다
이야기 나눌 이웃이 그리워
오늘도 닫힌 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휑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또 얼마만큼 뒷걸음질쳤을까
술 한 잔 나누며
내 속엣 맘 들어줄 벗들은 멀리 있으니
억새꽃 흐느끼는 언덕에 올라
함께 실컷 울어나 볼까
(한승수·제주의 서정시인)
+ 혼자라는 거
밤 2시경
잠이 깨서 불을 켜면
온 세상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나 혼자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혀 있을 수가 있을까
첩첩한 어둠의 바닥
조물주는 마지막에 있어
누구에게나
이렇게 잔인한 거
사랑하는 사람아
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아
(조병화·시인, 1921-2003)
+ 외로움이 말을 건넬 때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본다
저를 닮은
얼굴을 알아본다
너의 외로움이
내 안의 외로움에게
끈질기게 말을
건네는 이유가 그것
어깨 위에 바람을 싣고
쓸쓸히 돌아서던
뒷모습이여,
내 안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을 불러 세워
따뜻이 손 잡아주고 싶지만
세상에는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할
만남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도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외로움이
저를 닮은 외로움에게
눈 시리게 손을 흔든다
(홍수희·시인)
+ 외로우니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그래, 어쩌면 맞는 말이겠지
사람 같지도 않은 내가 외로우니까
어쩌면 좋은 말이지
깊은 슬픔이다
그래, 누구나 그런 걸 갖고 있겠지
나도 깊은 슬픔을 갖고 있으니
말만 들어도 가슴 아린 소리지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당연히 옳겠지만
정말 믿지 못할 일이야
외로워서 사람 같지 않은데
괴로워서 나는 점점 더러워지는데
그게 사람 같아 보이는 길이란 말이지
그래 좋아, 그 좋은 세상에서
나도 어서 사람이고 싶어
정말 그렇게 믿고 싶어
외로우니까 나는 괴로우니까
너무 깊은 슬픔 속이니까
어둠에 숨어서 사는 난 요괴인간이니까
어서 어서 자라고 어서 많이 착한 일 해서
사람이 되고 싶어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죽겠어
(이만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