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관한 시 모음> 김시종의 '세월' 외 + 세월 세월은 휘발유로도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얼룩도 지운다. 수석(壽石)에 묻은 페인트 얼룩, 기름걸레로도 안 닦이더니… 마당에서 몇 해 비를 맞게 했더니, 언제 지워진 줄도 모르게 말끔히 지워졌다. 세월이 지우는 게 어이 얼룩뿐이랴? 돌 같이 단단한 마음도 세월 앞엔 모래성이다. (김시종·시인, 1942-) + 세월 마당에 민들레 꽃씨 내려앉는 소리도 들었다 싹을 틔우는 뿌리들이 땅바닥을 갈라뜨리는 소리도 들었다 담벼락에 구름 지나가는 그림자도 보았다 밤새도록 닫힌 문을 흔들다 가는 바람의 얼굴도 보았다 (김석규·시인) + 세월이 질투하는 풀밭에서나 나무 밑에서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손을 잡는다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세월은 칼을 들어 끊으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칼 맞지 않으려고 손을 숨긴다 숨긴 손 위에 낙엽이 떨어지고 숨긴 사랑에 흰 눈이 내린다 (이생진·시인, 1929-)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시인, 1926-1956) + 가는 세월 나를 유혹하는 그대의 빛깔에 깊은 정 젖어 드는데 무정한 세월아 아서라 꽃잎 떨구지 말아라 너는 어이해 내 빈 가슴속에 둥지도 틀지 않고 새처럼 훌쩍 날아가 버리는가 발 동동 구르며 서러운 이별로 가는 세월아 이리와 술 한잔 받고 쉬었다 가거라 (서문인, 시인, 1962-) + 세월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것이 끊임없이 흐르고 오고 가고 오고 가고... 나는 또, 어쩌다 한 세월 저당 잡혀 흐르게 되었을까 물은 물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나는 나대로 흐르니 세월이야 가던 말던 내 알 바 아니지 암- 내사 모르지 (김점희·시인) + 그렇게 세월이 있었네 눈뜨면 그대 없는 빈 방 눈감으면 그대 곁에 있는 나 그대와 나 사이엔 그렇게 세월이 있었다. (남경식·사진작가 시인, 1958-) + 세월 빈 수레 굴러가듯 무심한 세월은 잘도 간다 일상의 부스러기들 온갖 곳에 뿌려두고 그냥 지나쳐 가질 않는다 이것도 참견하고 저것도 간섭한다 세월은 꿰매고 덧 꿰매도 질질 새는 바가지 같은 것 언제 깨질지 모를 오지 그릇 같은 것 세월은 너무나 서둔다 발정 난 수캐처럼 너무나 앞서 간다 (김해룡·시인) + 세월 집사람은 두 달에 한번 병원엘 간다 일년에 여섯 번 어김없이 병원엘 가야한다 달랑 혼자인 우리 아이도 두 달에 한번 병원엘 간다 일년에 여섯 번 병원에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 우리집 세 식구 중 두 사람이 병원에 다닌다 한때는 한 달에 한번씩 다녔으나 이제는 두 달에 한번씩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윤고영·시인) + 세월 뒷산 계곡 작은 연못 잔잔한 물결 위에 낚싯대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다 무심한 세월은 깊은 가을을 지나 득달같이 달려나가고 나는 그 세월에 목이 매여 질질 끌려가고 있다 동행하려면 열심히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아둔함에 게으름에 세월은 저만치 앞서서 달려나가고 나는 끌려만 가고 있네. (이문조·시인) + 세월 파뿌리가 일렁인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잔주름이 이마를 할퀸다 꾸짖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시리고 뻐근하다 심하게 사랑을 하지도 않았는데 눈이 침침하다 황사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마누라가 무섭다 가까이 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반기룡·시인) + 세월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잡히지 않는 것은 안개뿐이 아니다 골백번도 더 맹세했던 그 사람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등을 보인다. 떠나버린 사랑은 핥으면 핥을수록 쓰디쓰고 지나 온 세월은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어지럽다. 내 마음은 평생을 그 자리인데 네 몸은 한순간에 멀리 가 있다. (정성수·시인, 1945-) +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온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은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서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은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 향기 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나해철·의사 시인, 1956-) + 좋은 세월을 기다리며 이 진흙 세월이 가고 나면 언덕너머에서 기다리던 꽃밭 세월이 활짝 꽃 피우고 걸어 와 내게 손 내밀어 주겠지 갈라진 발바닥에 채이던 돌부리도 피 흘리던 이마 닦고 돌아서서 환한 이빨로 붉은 사과를 깨물겠지 따뜻한 온돌에 누워 지지고 싶은 허리가 비행기 날아간 언덕 너머로 자꾸만 쏠리는 저녁 아련한 석양에 취해 술잔을 비운다 궂은 날이면 아려오는 삭신이 마흔 고개 넘기면 씻은 듯이 낫겠지 기다리면 좋은 세상 무동 타고 오겠지 (강영환·시인, 1951-) + 세월 한 올 한 올 느는 새치 속에 내 목숨의 끄트머리도 저만치 보이는가 더러 하루는 지루해도 한 달은, 일 년은 눈 깜짝할 새 흘러 바람같이 멈출 수 없는 세월에게 내 청춘 돌려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으리 그래도 지나온 생 뒤돌아보면 후회의 그림자는 길어 이제 남은 날들은 알뜰살뜰 보내야 한다고 훌쩍 반 백년 넘어 살고서도 폭 익으려면 아직도 먼 이 얕은 생 깨우칠 수 있도록 세월아, 너의 매서운 채찍으로 섬광처럼 죽비(竹 )처럼 나의 생 내리쳐다오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