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시모음> 이형기의 '나무' 외 + 나무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이형기·시인, 1933-2005) + 나무를 위하여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꺾어지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은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란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몸 움츠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신경림·시인, 1936-) + 세상은 나무가 바꾼다 이 세상은 나무의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아름답지 못할 때 숲에 들면 나무는 얼마나 많은 목숨을 살리는지 내 뼈마디가 다 꺾인다 햇빛을 향해 속살 말랑말랑한 가지는 휘어지고 문득 방향을 틀었지만 그건 억지도 도식도 아니다 햇빛도 나무 때문에 지구에 온다 나무는 햇빛의 속마음을 제 잎사귀에 적어두고 나머지는 온갖 꽃이나 벌레들의 색깔과 뭇 짐승의 체온으로 돌려준다 그래서 만산홍엽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무엇 하나 하는 일이 없는데 나무는 제 일이 세상일이고 세상일이 제 일이다 지난여름 그 무서운 태풍과 겨뤄본 듯 내 허벅지만한 나무 한 그루, 입동 가까운 세상에게 제 몸을 말려 건네주고 있다 이 세상은 나무가 바꾼다 (황규관·시인, 1968-) +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이파리 파랗게 뒤집는 것은 몸속 굽이치는 푸른 울음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 흔드는 것은 몸 속 일렁이는 푸른 불길 때문이다 평생을 붙박이로 서서 사는 나무라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이별과 만남 또, 꿈과 절망이 없겠는가 일구월심 잎과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틈틈이 그늘 짜는 나무 수천수만 리 밖 세상 향한 간절함이 불러온 비와 바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렇듯 자지러지게 이파리 뒤집고 가지 흔들어댄다 고목의 몸 속에 생긴 구멍은 그러므로 나무의 그리움이 만든 것이다 (이재무·시인, 1958-) + 나무들의 마을 마을 한 바퀴 들러보니 나무들 거기 서 있습디다 뒷동산에 청솔나무 동구밖에 정자나무 맑은 바람과 투명한 햇살 그 싱그런 초록 전류에 갱변의 미루나무로 차르르 당산의 배롱나무도 차르르 어디 그뿐 아니라 사람도 거기 깨어 여전합디다 참등나무집 과수댁 오동나무집 보성영감 등꽃 달고 오동꽃 보며 그런 대로 거기 살 듯 은행나무집 할매도 성성히 대추나무집 노총각도 팽팽히 (고재종·시인, 1959-) + 나무의 꿈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 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 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문정영·시인, 1959-) + 나무의 밀교 누군가 내게 보낸 봉인된 엽서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저 나무의 애틋한 눈길은 천상의 우체부를 닮았다 지난 겨우내 썼다 지우고 지웠다 다시 쓴 생명의 시간, 나무는 수도 없이 잎들을 땅에 떨구며 자신을 버리고 한번 버렸던 잎들을 봄마다 다시 주워들어 지나는 이들에게 애타게 손을 흔드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은 볕에 물들고 빈 나무의 풍요한 밀교를 기억한다 길을 가다가 살펴보면 나무는 한 권의 책이 되어 있다 미처 건네주지 못한 숱한 사연과 온기들을 둥근 나이테 사이에 두툼하게 끼워 두고 새파란 우체통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 자물쇠 없는 우체통에서 오래 잠들었던 내 사랑을 흔들어 깨울 때, 몸에서는 짙푸른 잎사귀가 돋아나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불쑥, 초록 손을 내밀어보는 것이다 (권영준·시인, 1962-) + 나무의 詩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류시화·시인, 1958-) + 나무의 몸 나무를 자르고 나서 나무의 몸 안을 본다. 나무의 몸 속은 티끌도 없이 눈부시다. 뿌리의 하얀 뼈를 세우고 세월의 둥근 집을 새겨온 나무의 몸. 잘려진 나무의 몸 속에 싸한 향기 가득하다. 몸 밖의 비바람을 키우며 몸 안의 그리움을 따라 돌고 돌아온 나무의 세월 나무는 알았을까 아득히 멀어 끝도 없이 이어진 세상 속 길 잘려진 나무의 둥근 길 따라 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 줌의 눈물마저 침묵으로 다져 놓은 하얀 빛. 나무의 몸 안에는 천년의 세월 견디며 켜 놓은 둥그런 등불 하나. (고현수·시인) + 믿음에 관하여 나무를 보니 나도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겠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있어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에 내 마음의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 눈과 비, 천둥과 번개를 말씀으로 삼아 내 마음이 너덜너덜 닳고 헤질 때까지 받아적고 받아적어 어떠한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침묵의 기도문 하나 허공에 세워야겠다 남들이 부질없다고 다 버린 똥, 오줌 향기롭게 달게 받아먹고 삼킬 수 있는 나무, 무엇을 소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나무, 누구에게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그런 나무의 믿음을 가져야겠다 하늘 아래 살면서 외롭고 고독할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싶을 때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에 그런 믿음을 가득 새겨야겠다 (임영석·시인, 1961-) + 나무의 생애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